역사

삼전도비와 장량상마애비

책향1 2009. 4. 2. 16:12

삼전도비와 장량상마애비

 

치욕의 비문에 대한 글을 적게 되었다. 삼전도 비문을 지은 당시 이조판서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최근 우리가 배운 대로 청의 강요에 의해서 이 비를 세웠다고 최근 학설은 우리 스스로 세웠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 이유로 아들과 대신들이 볼모로 잡혀가 있고 조공과 군대 파병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서이다. 조선이 비를 세우기로 제안하고 이후에 나온 비석에 대한 요구이다. 정축 화약(丁丑和約)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 예를 행한 후 작성되었고 그 내용 중에는 비 건립에 대한 강요는 없었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기는 시늉을 하면 화평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
실리보다 명분을 좇는 우리의 유교적 사상은 온 국민이 참화를 입은 호란으로 나타났으므로 아마 큰 재난을 없애려고 한 외교적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평화가 낫다는 발상이다.
두 비의 외양이 무척 다르지만 글 내용이 청나라 황제를 감상적이거니 허황하게 표현한 점은 공통이다. 상대가 다르지만 전승 내용임 점을 인정하면 청 황제의 은공(?)은 대단하다. 귀부와 비문, 이수부분이 잘 갖추어진 삼전도비는 세우는 과정에 크기 등으로 그들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 1637년(인조 15년) 선조가 왕명으로 단소를 쌓고 각을 만들라는 명을 내리고 1639년에 세웠다. 200년 후인 1895년 고종 황제가 굴욕적인 비석이라는 이유로 한강에 던졌고 1913년 일제가 강바닥에서 다시 발굴하여 세웠다. 광복 후 지역민들에 의해 치욕스런 비라 하여 땅에 매립했던 것이 1963년 홍수에 의해 발견되어  원위치에서 약간 동쪽으로 이전 재건립 되었다.
비문 내용은 청의 조선 출병 이유와 조선의 항복사실, 청 태종이 피해를 주지 않고 철군하였다는 내용이다.
 몰락한 서인들이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인조반정 결과  반정세력들이 광해군 이전의 외교노선을 부정하고 숭명반청의 기치를 높인 결과물이 삼전도비이다. 폐모살제한 광해군에 대한 유교적 응징을 위함이라는 것은 대의명분이다. 1935년 5월 24일 일제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에 따라 보물 제 16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가 3.95m폭이 1.4m이다. 이 우람한 비석 크기만큼이나 부단한 신고의 세월은 항상 백성들의 몫이다.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비 제목은 여이정이 썼다. 그러나 백헌(白軒) 이경석이
비문을 지은 지 30년도 더 지난 1668년(현종9)에삼전도 비문 찬술을 놓고 비판이 제기된다. 시비를 제기한 인물은 백헌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왔으며 그 보다 12세 연하이던 우암 송시열이다. 당시 백헌은 74세로 현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연회를 벌였는데이때 우암이 궤장연서를 지어 바친다. 우암은 이 글에서 백헌의 정치적 공적을 찬양하며 임금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은 것을 하례하는데, 오래도록 편안히 살았다는 뜻의 수이강(壽而康)이란 글자를 삽입한다.

이 글에 담긴 의도는 누구도 쉽게 알 수 없는 것이었고당사자인 백헌도 모른 채 지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현종이 신병치료차 온양온천에 행차했을 때
백헌이 올린 차자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판단한 우암이 대죄차자를 올리면서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다.
송나라 흠종을 따라 금나라에 잡혀가 그들에게 아첨하여 '수이강'한 손적(孫覿)에다가 백헌을 비유하였던 것이다.  백헌이 직접적인 대응을 않은 채 2년 뒤 세상을 뜨자 삼전도 비문 찬술 시비는 일단락된다.
 1703년(숙종29) 12월에 비문 시비가 재연된다. 비문이 지어진 지 60여 년 뒤의 일이고 백헌과 우암이 작고한 지 35년과 15년 뒤의 일이다. 서계 박세당(1629-1704)이 백헌의 신도비명을 지으면서 우암을 비난하고 백헌의 공적을 칭송하였다.
이에 노소 간의 공방이 격화되고 마침내 서계가 개인적으로 집필한 사변록과 백헌신도비문이 '투화수(投火水)' 처분을 받게 되고 서계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삭탈관직된 뒤 원찬(遠竄)의 명까지 받는다. 백헌신도비명을 짓고 병이 났던 서계는 집에서 요양하다 이듬해 8월 세상을 뜬다.
웃지 못 할 붕당으로 나라가 망하던 말든 자신들의 명분 쌓기에 능한 유학자들이 주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 장량상마애비는 이름에서 보듯 바위에 세긴 비석이다. 정식 이름이 장량상동정마애비로 임란 시 명의 유격 대장 장량상이 기고만장하여 허세를 부린 흔적이 역력하다. 주위를 당초문으로 두른 이비는 도 유형문화제 제27호로  남해읍 선소리 바닷가에 있으며  높이 2.5m, 폭 1.5m 암각문으로 되어 있다.
정유재란 종전 해인 만력 27년(1599년) 장량상이 새겼다. 삼전도비가 세워진 해로부터 꼭 46년 전의 일이다. 2003년 9월 13일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바닷가로 떠밀려 넘어졌으나 다시 세워 보존하고 있다.
1771년 귀양길의 유의양은 노량에 도착하여 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점심을 먹을 동안에 서원에 올라가고 싶기는 하였으나 나의 길이 죄명으로 바삐 가는지라 올라가 보지 아니하였다.” 던 유의양은 남해문견록에서 2월 14일 경 이 마애비를 보고서는“글씨가 명나라 고적이 완연하니 아동 사람이 대명 은혜를 어느 때인들 잊으리오?”라며 명의 은혜를 찬양했지만 바로 호란을 잊은 대 유학자의 공리 또는 명분 쫓기는 너무 지나치다. 
 아래의 비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만력 26년 가을 국가에 다시 동쪽 오랑캐의 침략사변이 있었으니 이때 조선은 왜구의 환난을 당한지 6·7년이 되는지라 명군이 구원한 후 승전소식을 올리지 못하여 천자께서 성을 크게 내시어 중승만공(中丞萬公)에게 명하여 군사와 병참을 정비토록 하고 총독에는 대사마 형공, 도독에는 진공이하 문무장신 10여명이 병사들을 이끌고 앞 다투어 압록강을 넘어 몇갈래 길로 나누어 진격하니 그 원군의 위세는 매가 하늘높이 날아 오르는 것 같고 영풍(英風)은 먹이를 노리는 범과 같으니 장신들이 다 같이 협력하여 충성을 다하매 낙랑(樂浪)을 거쳐 계림을 지나 그 위용이 부산에서 빛나도다.
광분하는 왜적을 봉쇄, 격퇴하였으니 옛 예를 본받아 제왕의 출사명령에 따라 웅장한 군으로 국위를 선양했다고 할 것이며 구대상(區大相)으로 하여금 이를 기록하게 할 것이다.
원수의 발자취를 완전히 쓸어버린 노역을 다했거늘 하물며 천자의 군사가 오랑캐를 정벌함에 작전계획에 만전을 기하여 폭란을 제거하니 일은 반드시 이기는데 있으므로 순치하는 위세가 엄숙함을 다하게 하고 마땅히 밝게 보여주니 멀리서 영원히 복종토록 하고 천자의 말씀에 승복한 것이다.
이에 시 2장을 지으니 비록 맹자의 말씀과 같이 우아한 맛은 없어도 모든 위엄을 선양하기 위하여 이렇게 적는다.


@참고
1.만력은 명나라 신종의 연호
2.진공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제독 진린을 말함
3.영풍: 세찬 바람을 말함
4.낙랑은 평양을 말함
5.계림은 경주를 말함

말씀에 가로되

제1장
황제가 노하시어 오랑캐의 난을 평정 하였도다.
장사들이 분발하여 쉴 겨를조차 없었도다.
긴창 휘두르며 센 화살을 쏘았도다.
갑옷이 찬란하고 별과 달도 빛나도다.
큰 바다를 박차니 파도도 숨을 죽이고
장검을 휘두르니 천하가 모두 선경이로다.
천제의 臣이 사냥을 나가니 모든 금수들이 굴복 하도다.

제2장
황령이 떨치심이요, 천하가 굽어 들도다.
불의를 치니 모든 악의 무리가 조용해지도다.
갑옷을 떨쳐입고 나서니 모든 무리가 굴복하여 따르도다.
큰 고래를 봉쇄하니 작은 고기들이 맥을 추지 못하더라.
눈을 크게 뜨니 온 천하에 영향이 미치도다.
이 위대한 공적을 큰 비에 새겨 기리 후세에 남겨 두리니 .
먼 나라에 이르시는 고마운 어른으로 받들어 모시리라’

萬曆二十六年季秋國家復有事干東夷維時朝鮮受倭患之七年兮我師求之後未報捷 天子赫然震怒乃命中丞萬公往視師經理與總督大司馬刑公都督陳公以下文武將臣十餘人兵會於朝鮮先後濟鴨綠江數道竝進惟公將志鷹楊英風虎視曁于群公岡不協乃心力竭厥忠謨將輘樂浪喩鷄林師於釜山封黥鯢而返太使氏區大相以爲從古帝王出師命將咸有言以壯軍客宣國威伸同仇之誼軫於役之勞矧夫以天王之師征誅夷狄芟除暴亂算出萬全巳在必克順治威嚴于慈爲盛宜昭示遠腹永詔來䆊於是作二章踓之孔碩之雅庶揚有威之爾
其詞曰 皇赫怒弓完夷亂 壯士奮兮不煌宴橫長載?箙勁箭 組甲耀兮星辰換 蹴溟渤 兮波濤晏 倚長劒兮扶桑岸 四極莫兮 鰲足斷皇震兮窮海外 征不庭兮靜殊類 甲族悅兮從公邁 封黥鯢兮戢鱗介加目出兮極地界標窮碣兮際荒裔異域來兮嘉王會

 

2009.4.2 16.11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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