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다솔사를 아시나요.

책향1 2009. 3. 15. 12:08

다솔사를 아시나요.


김동리 선생의 소설 등신불이 고교국어 교과서에서 배울 때는 참 어렵게만 느껴졌다. 남해에 살면서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이 당시 국어Ⅱ에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일반적으로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작품은 기억에 오래 남을 뿐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도 아늑한 문학의 진한 향기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서포의 작품이 좀 더 교과서에 많이 실렸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등신불과 만해의 독립선언서 초안은 다솔사의 현존 안심료에서 집필했다.

남해에 인접한 곤양의 조그마한 사찰 다솔사의 불연에 대해서 적어본다. 다솔사는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와룡산) 동남쪽 기슭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로 503년(신라 지증왕 4) 연기조사(緣起祖師)가 개창하면서 영악사(靈岳寺)라 했다. 636년(선덕여왕 5) 자장(慈藏)이 사우를 짓고 다솔사(陀率寺)로, 다시 의상(義湘)이 676년(문무왕 16)에 영봉사(靈鳳寺)로 고친 것을 신라 말기 도선(道詵)이 불당 4동을 증축하면서 다솔사라 불렀다고 한다. (포털다음 백과 사전에서 인용-일부수정)

다솔사라면 소나무가 먼저 연상된다. 절 이름의 내력은 1749년에 중건한 대양루(大陽樓) 중건기에 있다. 다솔사 터는 장군대좌혈(將軍大座穴)이다. 따라서 어금혈봉표를 새겨 권문세도들이 묘자리를 쓰지 못하도록 했다. 장군 자리이고 다솔인 만큼 많이 거느린다는  얘기다. 임란 시는 많은 군사가 있었던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거느린 군사는 쭉쭉 하늘로 뻗은 소나무이거나 불교 의미로 불연의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의미로의 추정은 큰 무리가 아니다.

다솔사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최범술 대종사이다. 부처님께 귀의하여 평생을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차선삼매(茶禪三昧) 수행을 한 고 효당 최범술 대종사 탄신 백주년 기념 추모 차담회가 2004년 12월 19일 동국대학교 90주년 기념 문화관 예술극장에서 추모 차담회도 있었다.

 효당 최범술 스님이 1917년 나이 14세에 이곳에서 출가했기 때문이다. 효당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 서울에서 내려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책임을 맡았고 대구 등 인근에 배포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만 15세가 미만으로 석방되었다. 일경에서 풀려난 효당은 학업을 위해 도일 재일조선불교청년회 활동을 하였다. (상게 포털다음에서 인용)

 1933년 일본 다이쇼대학 불교학과 졸업 직후 귀국한 효당은 조선불교청년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만해 한용운이 총재인 19명의 승려로 결성된 비밀 항일 단체인 만당에 가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 무렵의 다솔사는 국내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이고 후견인 역할을 했다. 당시 주지 효당은 만해의 생활까지 책임졌는데, 만해의 회갑 잔치(1939)를 열기도 했다. (출처불명 포털다음 카페에서 인용)

안희제 선생이 창업한 백산상회 장학생으로 프랑스 소르본대학 유학을 다녀온 베르그송의 제자 김법린 선생은 1963년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법린은 김동리와 깊은 친분이 있었다. 1934년 불교계의 항일세력이 불단의 주도권을 상실하자 만해 한용운은 그들을 효당이 주지로 있던 다솔사로 내려 보냈다.

안희제 선생은 경남 의령 출신으로 1911년 부산의 백산기념관 자리에 지물포인 백산상회를 열고 무역업을 하면서 국내외 독립단체를 지원했다. 1942년 일본경찰에 체포, 9개월 여 옥고를 치른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병사했다. (포털다음 백과사전에서 인용)안 선생은 동화약품 초대사장 민강 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大同團)에서 활약했다.

“중앙에서 실패한 김법린(金法麟) 전가족, 허영호(許永鎬), 한보순(韓普淳)과 불교계와는 다른 김범부(金凡父 김동리의 맏형)선생과 그 전 가족(동생 김동리 포함) 등의 생활을 다솔사로 데려와 내가 맡았고, 만해선생의 생활상의 책임도 져야 했다.”(청춘은 아름다워라-최범술43」, 『국제신보』인용)

고색창연한 맛배집은 해방 전후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도량이고 교육장이기도 했던 유서 깊은 처소이다.

다솔사는 문인뿐만 아니라 화가 허백련 등 한 때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수시로 드나들거나 은거지로 수년씩 머무르기도 했던 곳이다. 한용운, 김범부, 김법린 같은 우국지사들은 이 울창한 소나무숲  처소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독립을 논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신석정 시인에 대해)“당대 문인들이 해인사로, 다솔사로, 월정사로 스며들어 암흑기를 견딜 때 석정은 도피하지 않고 고향 부안에서 태양을 그리며 가슴을 뜯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말에서 유추해보면 다솔사는 일제강점기 암흑기 유명 문인들의 은거지였음은 확실하다. 

다솔사가 사찰로서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문연이 깊은 사찰로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남해고속도로 곤양 나들목에서 얼마 되지 않는다.

 

 

2009.3.15 12.05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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