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북경 주마간산기
-북경에도 무궁화는 피었다-
첫 중국 여행이라 기대감이 컸다. 비행기가 중국 상공에 이르자 자주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요행스레 창가 자리가 남아 옮겨 앉을 수 있었다. 산이 별로 보이지 않는 처음 보는 중국 대륙은 대단했다. 놀라운 점은 바둑판처럼 잘 정리가 된 취락 구조, 농경지였다. 밝고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과 잘 정리된 넓은 농경지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첫날 8월 31일 천안문 광장으로 갔다. 광장 옆 국립 박물관을 가서 많은 유물을 구경했지만 가장 놀란 점은 동경(銅鏡), 즉 구리거울이었다. 보통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발견 되는 동경은 손바닥만 하다. 그곳 입구 옆에서 전시된 동경은 피자 한 판 보다 큰 것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가 본 동경들은 모두 옛 남해군향토역사관에서도 전시된 동경과 같이 푸른 녹이 나고 자그만 했다. 그런 것만 보다 완벽히 보존 된 몇 배 크기의 동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전시된 동경 중 하나는 일본에서 만들어졌고 일본풍 그림이 그려져 있는 헌상품이었다.(아래 필자사진. 동경)
천안문은 많은 사람들과 더운 날씨지만 웅장한 건물이 사람들을 압도했다. 천안문은 우리의 숭례문 격인 외성의 정문이고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午門)이다. 그 뒤는 바로 영화“마지막 황제”를 통해본 자금성이었다. 일본 침략자들의 조종에 따라 운전사로 위장취업한 일본인이 푸이의 부인 두 명 중 한 명과 간통을 하고 그 자식을 주사기로 독살하는 장면은 명성황후와 같은 운명으로 오버랩 되었다. 간악한 일본의 왕조 파괴가 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린 푸이가 문무대관들이 조아리고 있는 가운데 여치집을 갖고 놀던 모습도, 주렴 뒤의 서태후가 아편에 중독되어 긴 담뱃대를 물고 약으로 쓸 거북이를 삶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래 필자사진. 천안문 앞에서)
북쪽 끝문인 신무문을 나와도 보안검색대가 있다.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가방을 검색대에 올리고 검색을 여러 차례하여 더운 날씨에 짜증도 난다. 천안문 쪽에서는 보이지 않던 해자(垓字)가 보인다. 족히 폭이 50m나 돼보이는 해자는 또 다른 호수 였다. 경복궁에는 해자가 없다. 동경 크기에 놀라 듯 공주 공산성이나 경주 월성의 해자를 제외하고 우리의 성벽에서 겨우 희미하게 남았거나 발굴되는 해자는 좁고 얕다.
필자가 일본에서 거리마다 만났던 크고 작은 신사는 기둥이나 주포에 검은 색이 칠해져 있었다. 따라서 조명이 없으면 음산한 기분마져 들었다. 중국은 역시 붉은 색의 나라였다. 거대한 기둥이 붉은 색이고 간판 역시 붉은 색이 바탕이었다. 우리도 절이나 전통 건물에 기둥에는 붉은 색이니 별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길고 큰 간판에는 거대한 한자가 주눅들게 했다. 제법 한자를 안다고 자부하던 필자는 획수를 지나치게 줄인 한자(간자체)는 짐작하는 데에도 무리가 따랐다.
중국 3대 정통 환상극인 금면왕조(金面王朝)를 관람하고 나온 화교성(華僑城) 광장 맞은편 상점의 상호 끝자가 물 수(水) 자 세자를 겹쳐 놓은 것(淼)이 있어 가이드에게 물어봐도 음을 모른다고 하였다. 가이드의 말대로 아마 물이 많다는 뭐 그런 뜻이겠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귀국 후 확인 해보니 물 아득할 묘자이고 중어 발음은 미아오다. 수면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모양을 표현한 글자이다. (아래 필자사진. 화교성 앞)
참고로 금면왕조는 전래 신화를 바탕으로 거금을 투자하여 만든 중국 정통 공연작품이다. 북경 내 가장 큰 테마파크인 화교성에서 중국 내 최정상급 감독, 편극, 무대미술, 조명, 음악제작자, 의상제작사 및 200명 국내외 우수한 배우들이 함께 하는 예술작품이다. 몽환적인 장면에서 바뀐 회전식 무대에서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끝 장면은 웅장하고도 실감이 났다.
자금성 외곽의 해자나 화교성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물이 지천이었으나 첫날부터 필자에게 물은 고통이었다. 환전을 안 해간 탓도, 환율을 모르는 탓도 있어서 생수 구입이 어쩜 고통이었다.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들은 음식점에서 왜 냉수만 주느냐고 항의를 한다고 들었지만 다 문화의 차이다. 기름진 음식이 많은 중국인들은 식당에서 냉수보단 따뜻한 차를 줄곳 마신다. 그에 반해 한국인들은 냉수를 줄창 마신다. 이런 차이로 인해 상호 다소 불편함이 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음식과 화장실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은 말이다. 그래서 필자 역시 그런 걱정에서 벗어 날 수 없었지만 최소한 북경 지역에서 화장실 문제는 없다. 구조만 조금 다르지만 수세식 변기가 갖춰져 있고 재래식으로 쪼그려 않는 변기도 많다. 쪼그려 앉는 변기가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다. 유럽인들이 우리나라에서 불편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라니 어느 듯 우리도 서양식 걸터앉는 변기에 익숙한 탓이다.
음식 역시 북경 지역에서는 최소한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필자가 가 본 식당마다 양상치 버무린 것과 청경채 삶은 것, 삶은 배추 나물들과 가끔 김치와 짠지 비슷한 것도 나왔다. 특히 숙소인 홍루이그랜드뷰호텔 식당의 경우 마지막에 무짠지(?) 비슷한 것이 있어 다행이었고 양상치 버무린 것을 제외하고 한국과는 양념이 조금 달라 전체적인 맛은 달랐지만 견딜만한 음식들이었다. 초기 한국여행객들이 튀기고 볶은 기름진 음식에 3일을 견디기 힘들다고 한 말이 기억났지만 최소한 북경에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역시 한국인은 알게 모르게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 필자의 페이스북 사진을 본 일본인 여성도 걱정스레 물어보는 것이 음식 문제였다. 아마 비슷한 생각이었으리라.(아래 필자사진. 사천요리집의 음식)
필자에게 "중국에는 짜장면이 없다"고 우긴 중국집 주방장이 있었지만 북경에 짜장면집은 많다. 간판에 상호와 함께 파는 물건을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 구분이 용이하다. 음식점이 즐비한 현대화된 전통 시장 첸먼다제(前問大街)에서 작장(炸醬)이란 상호를 보고 들어가 짜장면을 맛보았다. 식당 상호에 많이 등장하는 면(面)은 분식인 국수 즉 면(麵)을 간단히 적은 것이다.
맛도 비슷했지만 듣던대로 역시 조금 짰다. 우리 짜장면과는 달리 면은 면대로 우리의 간짜장처럼 짜장을 작은 종지에 담아주는데 조금씩 넣어서 비벼 먹으면 괜찮다. 우리 짜장은 우리식대로 짜장에 감자, 양파 등을 넣고 전분을 넣어 양을 늘린 것이고 중국 짜장은 원래 대로 짜장 만을 볶아서 내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풍미라고 할련지 오래 숙성 시킨 맛이 났다. 참고로 짜장은 원래 자장을 우리 발음이 쉬운대로 적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동포교수인 마중가(馬仲可)는 저서 "쭝궈렌과 한꿔렌"( 中國人과 韓國人. 삼성출판사 간. 1982)에서 원발음대로 적는다면 "자짱"이 "맞다"고 하였다. (아래 필자사진. 분식집모습. 메뉴판에는 조선냉면으로 표기한 냉면도 있다.)
거리에서의 인터넷 사정, 즉 와이파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호텔 내에서도 와이파이가 가능하지만 원활하지 않았다. 전화 받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고 페이스북이나 카스토리는 거의 연결 되지 않았다. 더구나 호텔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관에만 가도 있는 컴퓨터가 없었다.
음료수 문제 외에도 의외로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필자의 어설픈 영어도 호텔 외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호텔에서도 녹차 캔을 맛 보고 맛있다는 필자에게 안내데스크의 그 직원 왈, "굿다"라고 하여 짐작 불가 였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영어로 "굿"이란다. 일본인들만 영어 발음이 이상한 줄 알았더니 중국인도 그렇다는 점을 알았다. 앞서 적은 대로 환전을 하지 않았고 환율을 전혀 모르는 경우,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물건 사는 데 고통이 따른다.
역시 중국은 "전탑(塼塔)의 나라" 다웠다. 우리는 석탑이 주로 많고 일본은 목조탑이 흔하다. 중국 시가지 풍경은 우선 큰 한자 글씨와 진한 회색 전돌로 쌓여진 높은 담장들이 많았고 공해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다. 신축 아파트가 많이 보였는데 아파트마다 3층 까지는 창문 등에 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80년대 필자와 부산에서 열차로 동행한 일본인은 집집 마다 담벼락이 많다고 하였다. 이에 필자는 변명을 하며 진땀을 흘린 적이 있다. 잘못하면 도둑이 많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에 "한국 전통 가옥은 밖에서 보면 집 안이 훤히 보이고 (자신의)땅에 대한 개념이 일본보다 강한 의미"라고 했다. 이전 일제 시대 경부선을 따라 여행한 다른 일본인은 초가지붕 위 고추 널어둔 것을 보고 보기가 좋다고 하며 "(초가집이)한국의 산천과 잘 어울린 좋은 집"이라 했다.
10개의 사찰이 있었고 침략한 몽골군이 바다로 오인했다고 전해지는 스치하이(什刹海) 주변 구성곽지 내 전통가옥을 인력거(?)로 돌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은 주로 흙과 볏집이거나 목조 기와가 대부분인데 중국은 흙을 구워 만든 모전벽돌로 된 기와집으로 전통가옥이다. 바닥도 담장도 전돌이다. 인력거라 하지만 자전거 짐칸에 좌석을 만든 차라리 인력 릭샤라 할만하다. 인도의 오토 릭샤나 베트남의 시클로가 떠오르는데 그보다 조잡하고 모두 중국 정부 소유란다.
스치하이 인력거 대기 장소 옆에서 지나다 본 곽말약의 구거가 있었지만 관람하지 못한 것이 큰 후회가 된다. 모두가 단체여행인 탓이다. 곽말약은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이고 사상가였다. 일본 유학을 하고 일본여성과 결혼한 그는 장제스의 공산당 추방에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근대 중국의 유명인들 중에 일본 유학자가 많다. 곽말약(궈모루,郭沫若), 진독수(천두슈,陳獨秀) , 루쉰((魯迅, 노신), 일본 육사를 나온 장제스, 쑨원(孫文)이 그렇다.(아래 필자사진. 문화거리에서 필자)
스치하이에서 나오면서 구멍가게에 들러 담배를 사고 5만 원 권을 내니 담배 한 값을 주고 잔돈으로 중국돈 5 위안을 내 주려해 질겁을 했다. 이제 알았지만 원과 중국 화폐 위안과의 환율은 1: 0.01이었다. 그렇다면 2천 원가량 하는 중국 담배 한 값을 사고 약 4만 몇 천 원을 잃을 뻔했다. 서로 무지 탓이려니.
승용차들은 택시를 비롯한 현대차들이 대충 10%정도였고 소나타와 투싼까지 보였지만 아우디, 벤츠, 도요타가 흔했다. 중국 역시 한국처럼 검은색 회색 흰색 차량이 많아 '무채색의 자동차의 나라'였다. 무수한 전기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있었다. 다만 좀 조잡해보이고 엉성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도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참 부러웠다. 왕복 6차선 도로 양편에 약 30m 정도 공터가 어디서든 보였다. 이건 아마 차후 도로 확장을 위해 준비해 둔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나무를 심어 뒀다. 꽃이 핀 국화 무궁화도 보였지만 주로 사시나무와 회화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땅 주인은 모두 중국 정부 아닌가. 그러니 도로 확충이나 공단을 건설하는데 건설비가 우리보다는 적게 들 거라는 상상을 해봤다.
단체 관광 시에는 현지 가이드가 중요하다. 제법 유식한 가이드를 만난 것은 다행이라 여기지만 감춰진 영리행위에 뜨악했다. 일정을 바꾼 후 지불하는 경비에는 많은 거품이 있다. 필자 일행이 추가 지불한 개인당 11만원은 용경협, 만리장성, 이화원을 추가해서 방문하는 경비였지만 국내서 인터넷에서 확인한 용경협(龍慶峽)의 입장, 승선료는 140위안, 만리장성 입장료 및 케이블카 요금도 140 위안이었다. 이화원(頤和園)의 입장료 승선료가 성수기 60위안이었으므로 교통 요금을 감안하더라도 바가지를 썼고 이런 여행 코스 변경을 제안하고 앞장 선 자들이 의심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아래 필자사진. 필자, 용경협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요행스레 창문가다. 언제 도착하려나 피곤한 눈을 감았다가 내려다 보니 오밀조밀하고 야트막한 산들과 아기자기한 풍경이 보인다. 한국이었다.
2016.9.11 11;20 화전도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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