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호은 대율사 비문 번역

책향1 2015. 2. 17. 08:04

드리는 말씀; 이 번역문은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표시는 판독이 어려운 한자입니다. 괄호안의 *표시는 필자의 의견을 표시했습니다.

한자 다음의 (?)는 그 윗 자가 의문시 된다는 표시입니다.

화엄사 호은대율사비

虎隱大律師碑

虎隱大律師碑銘竝書

호은대율사비 병서

律師諱文性號虎隱本姓密陽朴氏祖通政大夫啓福原籍南海郡

율사의 이름은 문성이고, 본성은 밀양박씨, 조부는 통정대부(*조선 시대, 문관의 정삼품 당상관의 품계) 계복이고 원적은 남해군이다.

移寓昆陽郡西面加引里生子龍玉娶綾城朱氏以朝鮮哲宗二

곤양군 서면 가인리(*창선 가인리의 오류로 보이나 하동군 금남면 지역은 1913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곤양군 서면이었음)에 옮겨 살았으며 조선 철종2년(*1851년) 경술년 8월 24일 태어났다. 능성 주씨와 결혼한 용옥의 아들로 태어났다.

年庚戌八月二十四日生律師母夢一梵僧自智異山來入懷母驚

율사의 어머니 꿈에 한 스님이 지리산을 드나드는 꿈을 꾸어 놀라워했다.

적(?)生産異香滿室始生不乳不? ???不與??童遊歲十歲父母

태어날 때 방안에 특이한 향기가 가득했으며 ?????? 젖을 떼고, 한창 놀 나이인 10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俱沒育於祖母吳氏又三年祖母亦沒孤子無依托于再從叔家寄

할머니 오씨 손에서 자랐지만 또 3년 만에 조모 역시 돌아가셨다.

고아가 되어 재종숙집에 맡겨져 밥을 얻어먹으며 공부를 했다.

食修學靈(?) 夜勤業生十六?家後龍門寺戒僧景虛能彦長老勤

밤에 일하고 공부하는 학생으로 16년 출가(?) 그 후 용문사 계승 경허, 능언장로에게 일하게 되었다.

乃祝髮而受戒于錦雨弼基和尙錦雨夢有一竹抽笛于庭覺而異之

이에 머리를 깎고 금우 필기화상에게 계를 받았다. 꿈에 어떤 대나무 하나가 뜰에서 피리를 꺼내는 것을 보고 깨어나 기이하게 여겼다.

困收爲汯胤(이을 윤) 初醴泉龍門寺龍湖海珠師講楞嚴經又學又

어려운 가운데 법통을 잇기 위해 처음으로 예천 용문사(*예천 용문사가 실존) 용호 해주 선생 설법을 듣고 불경과 학문공부를 지속했다.

學?敎拾大淵正添法王妙解深與, 太皇九年 壬申被選(?)受大禪

학문을 지속하던 중 대연 정칠 스님으로부터 경전을 깊이 해득하고 태황 9년(*1872년. 고종 9년) 임신년에 대선사가 되었다.

法堦甲戌昇中德乙亥二月嗣錦雨行傳燈禮丁丑進大德法堦同

갑술년에 법계가 중덕이 되었으며 을해년(*1875년) 2월 금우화상 행전에 등불을 다는 예를 이었으며정축년 대덕으로

年四月結夏于龍門寺白雲禪院籌(헤아릴 주)室戊寅春入定于河東郡雙溪

같은 해 4월 하안거 시작일(結夏) 용문사 백운선원에서 수행인을 교화하는 주실이었고 무인년 봄 하동 쌍계사에 입정(*방안에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어가는 일) 하였다.

寺明年春受請于國師庵萬日會講華嚴汯(빨리흐를 굉) 合騰(?)月八日夜有異夢

다음해 봄 합등(?* 4월을 登月이라 하므로 4월로 추정)월 8일 밤 이상한 꿈을 꾸고 국사암 만일화상에게서 화엄경 설법 강의를 요청받아 설법했다.

自此登壇說敎辯才無得名稱普聞於是受諸世登席居師爲傳法

전법을 위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거사의 전법을 듣기 위해 모였고 설법을 잘하는 사람으로 스스로 여기에 올라 널리 알려졌지만 얻은 이름이 없어 보문이라 불렸다.

戒者自庚辰至 丁巳 三十八年之間若(?)東萊梵魚寺順天松廣寺谷城泰安寺

율사는 경진년에서 정사년에 이르기까지 38년간 동래 범어사 순천 송광사, 곡성 태안사

統營安靜寺南海龍門寺泗川多率寺河東雙溪寺及?佛?陜川海印寺山淸大源寺溪寂及五峰庵咸陽碧松

寺固城玉泉寺高城楡岾寺杆城乾鳳寺

통영 안정사, 남해 용문사 사천 다솔사 하동 쌍계사 및 ?불? 합천 해인사 산청 대원사 계곡에 계셨고 또 오봉암 벽송사 고성 옥천사, 고성 유점사, 간성 건봉사에 계셨다.

 

安揚(?)釋王寺京城元興寺晉州靑谷寺護國寺求禮華嚴寺南海花芳寺等

안양 석왕사 서울 원흥사 진주 청곡사 구례 화엄사 남해 화방사 등

各刹惑一再惑三四足跡殆適(?)西北兩(?)南以自隆熙二年七月十五日於海

印寺上禪院設金剛戒壇閳(밝힐 천)明海東戒律以繼六世之巫脈延至十三大會

융희 2년(*1809년) 7월 15일부터 해인사 상선원 금강계단에서 연지 13년 대회까지 제6대 해동율사로 율사의 맥을 이었고 불 밝히고자 여러 사찰에 많은 족적을 남기시고 태황 16년 4월 8일부터 용문사에서 수륙대회를 열었으며 수 천 명에게 율법을 전하였다.

 

傳戒數千自 太皇十六年四月八日始設水陸大會於龍門寺嗣是三十

餘年之間慶西南沿海極援寃(원통할 원)魂者亦七八其他佛?? ?綾羅(??)梵宇重建器

30여년을 용문사에서 서남연해의 원혼을 달랬고, 칠 팔 곳, 그 외 절집을 중건하거나 .

具設備位 土森林等植業亦三四統營晉州開浦(?)敎堂廣募檀信 圓(?)暢宗者男

집기, 설비를 갖추었다. 산에 나무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통영, 진주 개포(?) 등에서 교단을 확장하고 불교를 널리 알리고자 남녀 신도 수 천 명을 살리고 중국 상해에서 찍은 남북장경 2부(남북장경은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간행된 불경을 말함)를 구했고

女信仰者數千人購(살 구)求支那上海所印南北藏經二部兮(어조사 혜)鎭護國華嚴二寺辛亥十月推薦慶南九寺刹聯合布敎堂開敎師長明年任海印寺布敎監督

또 우리나라의(*鎭護國) 화엄 두 개 절에서 신해년 10월 경남 9사 사찰연합회의 추천으로 해인사에서 포교당의 스승인 감독을 오랫동안 역임했다.

乙卯三月任護國寺布敎師丙辰七月結搆院于統營郡大和町遂閒(틈,사이 간)養丁巳

을묘년 3월 호국사 포교스님을 맡았고, 병진년 7월 통영군 대화정(*일제시대 행정 구역 명)에 선원을 열고 틈틈이 제자를 길렀다.

十二月二十八日招弟子朴性月謂曰吾一生事業雖曰不尠(적을 선) 一星兒事不如

정사년 12월 28일에 제자 박성월을 불러 달려온 내 일생의 사업이 비록 적지 않다 말하지만 별 하나 정도의 어린애 일이었을 뿐이니 되돌려 살펴 비춰보느니만 못하구나.

세상의 인연이 이미 다 했으니, 이제 마땅히 참됨으로 돌아가련다고 말하면서 마침내 입적하였다.

 

返照世緣已盡今當反眞遂入寂二時間後更生曰震海不在萬事多(?)碍吾當延命數日矣

그러나 두 시간 뒤 다시 소생하여 이 세상에(*참고; 진역(*震域, 우리나라의 다른 말)의 바다라는 의미지만 의역함)있지 않으면 모든 일에 장애가 많으리니, 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延命數日矣急命電招性月曰正當伊? ??本來面目耶師曰衆上太涅(?)

연명이 며칠이더냐. 위독하여 급히 부른 성월이 어찌 저것이 정당???중생은 많고 위이다고 했다.

槃圓明常寂照二日後震海來見師曰 汝來吾無恨因囑世事後自題臨終偈

열반은 밝고 평온하였는데 2일 후 진해가 와서 뵙고 <이 세상(*震海)을 >다시 와서 보자 율사는 너희들이 나에게 온 것은 세상의 무한인연이라고 한 후 스스로 임종게를 지으며

曰如何是佛宏的 大義自性本來空寂良久云是足甚??涅槃時戊午正

말하길 이것이 무엇이냐 부처의 대의는 스스로 깨달음이고 본래

月初三日午後二時壽六十九宏?五十四師一生持戒成儀無缺爲佛作汯

무오년 정월 삼일 오후 2시 열반하시니 세수 69세였고 법랍은 54세였다. 율사는 불법을 전하기 위해 계율을 지키며, 불경을 만들었으며 모자람이 없는 예의를 다했다.

不惜身命說法度衆辨才無碍 對人應接慈悲下心修禪求道勇猛精進見貧

대중에게 설법을 하고 재능을 알리는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신명을 아끼지 않았다.

자비로 사람을 대했으며 하심으로 수선구도를 했다.

病者拾金求濟修補寺刹捐義專力一生成績略述以上 入寂後連六夜放光

돈으로 가난한 자나 병자들을 거두고 사찰의 보수를 마치는데 전력을 다하였으며

일생의 업적을 위와 같이 약술하였다. 입적 후 연 6일 밤 빛이 났다.

闍(어두울 암)繼場 出靈珠數顆乙未正月三日夜後放光于前闍(망루 도)維場同二月二十一日

차분하고 그윽한 도량에 영험한 사리가 여러 개 나온 후 을미년 정월 3일 밤 전각에서 빛이 났고 같은 해 2월 21일

立塔于華嚴寺是夜又放光澈大鳴乎異栽銘曰

화엄사에서 탑을 세우는 밤 맑고 큰 울음소리와 빛이나니 참 이적이고 이를 비석으로 새긴다.

維虎大師近世名釋妙知心略述行蹟滅而不滅刻之于石茶毗舍利放光七夕

근세의 유일하고 이름 높은 부처인 호은대사의 불멸의 오묘한 깨달음을 알고 행적을 약술하니 멸하지만(*몸은 가지만 깨달음은) 멸하지 않게 돌에 새기니

다비식 후 사리는 칠일 간 빛이 났다.

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六年八月二日弟子嵩陽山人張志淵謹識

세존응화2946년 8월 2일 제자 숭양산인 장지연 근지

1919년 8월 2일(*음력) 제자 숭양산인 장지연 삼가 씀.

 

호은율사비 명단 부분 번역

1.

師旣入寂汯侶?其跡之泯(망할민) 各隨力(?)出資以 助勒石之賞足世俗耶(?)謂義(?)也

율사가 이미 입적하여 많은 승려들이 세상에 널리 알리고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힘을 모으고 돈을 내고 비석을 세우는 일에 각각 진력을 다 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이를 의로운 일이라 불렀다.

可長以記之又有世間 人感其義者竝錄之 如左若華嚴寺安靜寺各寺(?)之人泉隱寺

이에 감동하여 세간에 함께 널리 알리려고 겨우(*적게나마라는 의미임) 기록하여 두노라. 좌측과 같이 화엄사 안정사 천은사

碧松寺各六人雙溪寺十三人大源寺十八人多率寺觀音寺各十一人實相寺禪院

寺宋廣寺各二人泰安寺五人龍華寺四人玉泉寺九人臥龍寺十人統營郡人六

員固城郡人三負幷略之而主是役者朴震海陳震應也(?)

벽송사 6명 쌍계사 13명, 대원사 18명 다솔사 관음사 각 11명, 실상사 선원사 송광사 각 2명, 태안사 5명 , 용화사 4명 옥천사 9명 와룡사 10명, 통영군민 6명 고성군민 3명을 약술해서 병기하고 이 역할을 주로 한 사람은 박진해이고 설치한 사람은 진응이다. 


華嚴寺 

朴孝庵 鄭三雲 黃聖根 黃善云 李子月

朴抱月 安園峰 金蒲應 李善薰 金善亨 李??

吳桂庵 崔慈性 金万雲 金敬燁 金世日 孫日雲

金?峰 白西峰 金榮烈 朴奉煥 張應安 朴高惶

李?峰 池性海  姜斗兮(?) 金鐘燦  李妙德 金錦澤

李應濟 朴源應 梁普華 朴斗滿


泉隱寺 

崔香城

李普明 崔平濬 李成? 吳龍涉 河用化(龍華) 林寶齊


2. 

裵銑雲 金春溟 鄭布雲

 

靈源寺

洪敬惶 朴海龍

姜龍淵 姜桂月 吳慈雲 李雨(?)坡 朴性庵 張志炯

金秋應 申敬山 沈春潭 白初月 姜智月 金?潭

朴月齊 趙梵海 徐宅峰 金包光


禪院寺


張桂峰

金鶴云 梁龍(?)隱 朴惠隱 趙彰庵 蔡水龍 池龍山

朴炯奉 鄭浩應 朴万雨 朴碧山 金道善行 李雪松

柳永哲(?) 徐現月 


多率寺 

徐鳳仁 朴万窓


泰安寺

吳炅美(?) 金戒應 朴月蕉(?) 田信月 普國寺 梁映月

雙溪寺


大源寺 

梁珞庵 金同雲 金宏庵 曺簿渙

孫宗炫 趙永泰 崔雪霧(?) 金日庵


大福寺 


 金相家

李龍溟 金海侖 崔龍潭 朴瑞山 房映霞 李應河

李幻虛宋印月金尙訓金今云 趙玉濬 朴寶光                                           

崔晦明 姜映虛 高性燁


實相寺 


觀音寺 


許抱龍

金普明 崔幸俊 陳昌洙 李靑雲


龍華寺 


3. 

孫石潭  姜芝菅 李相龍 鄭九瑢 金亨培

朴寶潭  鄭章律 徐箕碩 廉箕鎭


谷城郡

金月制 


統營郡 

李法性花 廉鴻杊 朴基烈

柳錦浩 


安靜寺

李應眞 金沈松 金定允 鄭信海


李康潤 金靑蓮花 朴磌絇(??) 朴正模


松廣寺 

安沃鵬 李處機 都鎭鎬


 孫精敏 宋正宅 玉大覺化 朴基東

 金玉閨 姜大寶月 許大正覺 朴明浩

  金昌洙 鄭大衆火 曺圓覺海 朴大栦

  鄭大源華 廉化藏心 尹禮京化


弟子

朴震海 金尺月 朴性月 姜寶云 金貞寅 南施仁


玉泉寺 

全德云 李惠月 金奇云 安沈月 朴万善 朴沃秀 朴裁浩 姜印潭

金慧溟 金普明培 金響培 秋吉祥心

 黃金城 高道仁行 廉化藏海 固城郡

 田熙石 許明哲 李鎔範 朴金副坮 

 尹禮欲化 廉千化坮 朴淨光化 劉大元化

宋玉蓮花 朴祥植 廉鴻烈 金元培 

 


臥龍寺 


朴大光明 金九品坮 金永培


4.

金施敬 金龍船

朴震河 金應眞

秋致仁 尹熙九

梁玩虎 裵自敬

朴震應 文靑雲

姜施恩 孔施贊 朴龍潭 秋月 秋庵 李錫允 諸戒寅 河施律

朴戒允


華嚴寺

 住持陳震應

朴龍潭

總務李印月

 財務尹善文

  蘓永善

 書記金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