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세상읽기

일본의 역사 왜곡과 그 원인

책향1 2014. 2. 2. 15:31

 

 

일본의 역사 왜곡과 그 원인

 

최근 한일간 역사 문제는 어쩜 제로섬 경기 같아 보인다. 물론 일본의 일방적인 역사 왜곡이 늘 문제다. 여기에 곁들여 독도 문제까지 결부되어 전망이 매우 어두워 보인다. 독도를 포함해 일본의 전체적인 역사 왜곡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분석해 본다.

아베가 박대통령과 회담을 간청하는 것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이중성에 한국인들은 놀란다. 하지만 일본의 이중성, 한국인이 보는 그 이중성은 일본인 자신들에게는 어쩜 당연한 건지 모른다. 이런 사고의 차이에서 역사 왜곡이 성립되어 왔다. 객관적인 자료로 일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국화와 칼”이란 책이, 제목이 주는 상징성은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국화와 칼은 별로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왜 일본인을 표현하는 대명사처럼 되었을까. 국화가 주는 차분함과 정교함이 칼이 주는 잔인성은 책의 제목이 웅변하고 있다. 다데마에와 혼네라는 말이다. 다데마에는 면전에서 듣기 좋게 하는 외교적 수사이고 혼네는 본심 즉, 속마음이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다데마에에 속는 경우가 많다. 실제 일본과 한국에서 살아본 서양인들은 솔직한 한국인들이 더 인간적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오죽하면 일본인들의 다데마에인 거짓 친절에 감동하는 한국인도 많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친절은 인간적인 친절이 좋고, 친절한 척하는 상술적인 거짓행동에 식상하기 쉽다. 그렇다고 한국식 불친절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 록 공연장 같다는 피겨스케이트장이나 음악회에서의 한국인들의 정열은 차분함을 강조하는 일본인에게는 마음을 다 표현하는 미개한 짓으로 여길지 모른다. 따라서 가족의 장례에서 울음을 속으로 삼키는 일본인은 헛 울음이라도 울어야 하는 한국인이 역시 미개할지 모른다. 이런 점은 모두 일장일단이 있고 문화의 차이이므로 어느 쪽이 우월하다거나 좋다라는 표현보다 허례허식이 아닌 이상 한국인들의 표현 방식이 좋을 듯하다. 자기의 감정을 표현도 못하고 튀어나온 못처럼 나서지 못하는 일본인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느낌이 한국인들이 느낀다. 국화와 다데마에는 강자에 대한 굴종의 표현이고 칼과 혼네는 굴욕에 대한 복수심이다.

보통의 한국인들은 냄비근성으로 일본의 역사 왜곡과 독도 문제에서 그 근본 원인이나 이유를 찾지 않고 단편적인 분노 표현에만 익숙하다. 그렇다고 근본적인 치유 방법도 없기는 하다. 그 원인을 알아야 대책이 있다.

일본인들은 (물론 교육에 의한 거지만) 선민의식과 우월감이 대단하다. 이런 사고는 결국 타민족에 대한 배타심과 멸시로 나타난다. 여기에 근대 일본의 사상가들 역시 일본의 긍정적인 나아갈 바를 제시하지 못하고 국수적이거나 이기적이었다. 우리가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보는, 일본에서 선각자로 불리는 자들은 모두가 이기적으로 보인다. “조선침략은 일본인이라면 대를 이어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숭고한 의무”라 하며 서른 살에 사형당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라는 자가 있다.

그가 페리 함대에 접근해 해외 밀항을 시도한 후 유폐되었다. 유폐기간 동안 사설학원인 쇼가손주쿠(松下村塾)을 열어 극단적인 애국심을 고취했다. 그의 제자는 이토 히로부미,정한론을 최초로 주장한 기도 다카요시 등 기라성 같은 일본의 “선각자”들이 있다.

당시의 외압에 일본의 진로를 존황양이와 양이를 기본으로 하는 『유수록』이란 책을 엮었다. 이 책은 지금도 일본 역사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일본서기의 내용이 근간이다. 일본왕(천황)의 존재로 일본의 우월성을 표현하고 근린 제국들을 야만국으로 묘사되었고 지금까지 한국 멸시의 근간이라 해도 틀림이 없다.

이러한 내용에 따라 전전(태평양전쟁 전)의 일본 교과서에는 “신라정벌을 위해 떠나는 일본군을 환송하는 진공왕”이라는 목판화가 버젓이 실려 있었고, 80년대까지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지금의 가야지대를 임나(미마나)로 표기한 지도가 실려 있었다. “4세기 무렵 철자원의 확보를 위해 진출했다”는 설명도 자세히 있었다.

이 당시는 일본이 통일된 중앙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철자원 확보라든가 신라정벌은 모두 허위다. 일반적으로 일본 국가의 형성기는 8세기로 보고 있다. 강점기의 일제는 이런 신화 같은 일을 증명하기 위하여 김해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런 것을 증명할 어떤 유물도 없었다. 일본의 지배를 증명할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던 일본 서기 내용이 허구로 밝혀진 것은 고대사, 즉 일본 국가 성립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위와 같은 고대사가 기술되지는 않지만 현재의 일본 교과서와 일반인의 우월 의식에는 일본서기의 허구가 많이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역사 왜곡의 역사는 천년을 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왜곡 문제를 비판할 때 이런 유구한 역사를 모르는 대처는 사후 약방문격이다.

일본서기는 우리의 삼한을 조공을 받치는 야만국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일본군 2만7000명이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패하므로 멸망한 백제 유민 다수가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계 정착민들과 일본의 고대국가 건립하는 과정에서 편찬되었다. ‘일본’이란 국호가 670년부터 보이고 8세기 초까지가 일본의 국가 건국기로 보인다. 이때까지 역사 편찬자가 제대로 없었던 일본에서 백제유민이 사실과 신화, 전언 등을 적당히 혼합해서 자기만족과 신라에 대한 원한을 표현했을지 모른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애써 무시하며 허구를 사실로 아전인수격인 일본인들이 있고 그것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는 이상 일본의 역사 왜곡과 한국멸시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 일본인들의 혼네일 것이다. 진실을 도외시한 역사 놀음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으면 문제시 될 게 없다. 이런 사고방식이 선민의식으로 발전되고 신의 제국으로 발전했다. 필연적으로 타민족에 대한 멸시로 나타난다.

일본 국내 사정에 따라 자신들의 욕구 해소는 다른 나라나 타민족으로 향한다. 관동대지진에서 그들의 욕구 불만 해소 대상은 조선인이었다. 그 방법은 유언비어 날조다.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향한 곳은 한반도였다. 그 때도 역시 침략논리로 진공왕후의 삼한정벌이었다. 히데요시가 침략을 개시할 때 신사에서 제를 올리기도 했다. 도쿄대학의 전신인 개성학교(開成學校)등을 세우는 등 일본 근대 화학 교육의 기틀을 잡은 윌리엄 E 그리피스도 임진왜란이나 강화도 사건(1875)도 진공왕후의 삼한 정벌을 기초로 했음을 알렸다.

이러한 일본의 행각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가한 사람은 그 허구와 신화의 중심인물인 일본왕 쇼와이다. 1984년 광복 후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쇼와는 “(일본의)국가 형성시기에 다수의 귀국인이 도래하여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학문, 문화, 기술을 가르친 중요한 사실이 있다”고 했다. 아키히토는 2001년 간무(桓武 737~806)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 기록이 있는 것에 대해 한국과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했다. 보편적인 일본인들의 우월 의식에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는 말이다.  그들이 신봉하는 “천황”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장본인의 말에 일본 언론들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이중성을 들어냈다. 이런 현상은 일본왕 자신의 혼네일지 외교적인 수사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왕 자신도 거꾸로 흘러가는 듯 하는 일본사회의 역사 왜곡에 환멸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혼네의 일각이 주요한 행사에서 드러났다고 보인다.

일본만의 역사 왜곡을 시정할 별다른 수단이 없다. 다만 우리들은 일부에라도 남아 있는 일본의 양심 세력에게 오도된 역사관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 어찌 보면 일본왕이 직접 이런 류의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양심 세력에게 지속적으로 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실력과 도덕성을 길러야 한다. 바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일본의 속성을 철저하게 이용해야 한다.

최근 미국에게는 아부하고 중국이나 한국에게는 큰 소리인 일본이 스스로 초라한 민족임을 알도록 하는 일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실력을 쌓아야 함은 말 할 필요가 없다.

 

2014.2.11 19;34 남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