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유배문학관.南海島流し館

촌은집(村隱集)을 통해본 유희경의 생애

책향1 2010. 9. 17. 21:28

촌은집(村隱集)을 통해본 유희경의 생애



촌은 유희경(劉希慶)은 조선 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던 시기인 1545년에 태어나 1636년에 하직했다. 그를 풍류객으로 보게 하는데 한 몫 한 기생 매창(梅窓 1573~1610)도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촌은의 생애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난 무렵이다.

『촌은집판』은 남해군 이동면 용문사에 소장된 인쇄용 책판이다. 3권 2책으로 전 52권이다. 촌은집은 손자인 유자욱이 조부의 글 등을 수집 정리하여 증손자인 유태웅이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1979년 12월 29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유태웅이 호남만호로 여수에 재임 중 판각하여 안전한 보전을 위해 용문사에 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관된 남해향토역사관 소장품 중 영친왕 이강이 쓴 해주오씨 『쌍효문표』나 구한말 외무대신 박정양이 쓴『김용제 사령장』 등도 남해까지 오게 된 연유가 늘 궁금하다.

강화 유씨로 아버지는 계공량을 지낸 유업동과 배씨 사이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유도치다. 허씨와 결혼하여 순민 등 아들 다섯을 두었고 그중 일민은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에 추증되었다. 예문을 가르친 적도 있지만 특히 장의에 능통해 많은 초대를 받았다. 13세에 부친을 여의고 하루도 빠짐없이 시묘했다. 어머니 배씨가 30여년을 병석에 있었지만 손수 모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1618년 역신 이이첨이 모후를 폐하려는 상소문에 동조하지 않으면 형벌을 가하는 사태가 있었지만 "미천한 나에게도 어머니가 계시고 봉양이 급하여 그대 문안으로 들어갈 짬이 없었소이다"고 하여 절의가 높아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뿐만 아니라 임란에 평양으로 몽진을 떠나는 수레를 보고 비분강개 하여 의병을 모으고 하늘의 도움으로 토벌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촌은이 92살에 세상을 하직하니 사대부들이 거의 모두 조문했으며 마을안의 늙은이와 어린이들 까지 통곡을 했으니 그의 인품을 알 수 있다.

관심이 가는 부분은 황진이와 쌍벽을 겨뤘던 여류 시인이자 기생인 매창과의 연분과 침류대라는 정자를 만들고 많은 당대 묵객들과의 교분을 쌓았다는 점이다. 한미한 집안 출생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여고가 쓴 「촌은집발」에는 노년의 촌은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시에 노련한 실력이 있고 84살이지만 소아(騷雅)의 기상이 여전히 얼굴에서 배어 나오고 있다"고 했다. 촌은이 사랑했던 매창보다 오래 살았지만 당시로는 장수했다.

48세이던 1591년 봄 임진왜란 발발 한 해 전에 부안에서 매창을 만났다.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활약했던 촌은이 매창과 이별을 했지만 15년 후인 1607년 재회할 때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유지했다. 전시에도 가부장적 사고로 무장한 남정네가 한 여인을 잊지 못한 점은 특이하다. 이런 사실은 그도 역시 중인 출신이었다는 태생적 한계가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천출로 동지애를 애정으로 표출하였고 감성을 자극하였다. 왜란에서 의병으로 맹활약을 한 사실도 어쩌면 면천의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임란 후 천민 신분을 벗어나기도 했다. 「懷癸娘」에서 "그대 집은 낭주에 있고 내 집은 서울에 있다네

 서로 그리워도 만나지 못하니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애만 끊기는 구려." 라며 그는 여심처럼 시를 썼다. 이경전이 지은「촌은집인」에서  많은 나이에도 산과 강을 섭렵했으며 다른 글에서 관가정, 용문사, 비로봉 등 여러 곳을 주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시구는 모두 말년에 가까워 적은 것으로 보인다. 삶을 되새겨 보고 일찍 죽은 매창을 잊어려 했을 수도 있다.

소암 임숙영의 「침류대기」를 비롯하여 7편 침류대 관련 묵객들의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촌은의 교유 관계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조우인의 동명 글에 "물이 백악산 골짜기에서 나와 궁궐 담장 밖으로 흘러내리는데 <중략>유도인은 금호문밖에 숨어 살면서 누대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후략>"에서 침류대가 궁궐과 가까운 북한산 계곡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촌은의 효행은 이미 남달랐고 재례 등에 탁견의 소유자로 많은 부름을 받았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가 중인 출신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상심리의 작용으로 말년에 많은 음유객들과 교유와 전국 주유가 있었다고 보인다. 권2에서 유몽인이 쓴 전기에 "기자이래 귀천에 대한 구별이 너무 심해 큰 폐단을 불러왔고"라 하며 귀천에 관계없는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했으며 충효 정신이 각별했음에도 늙도록 나라의 은혜를 받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촌은은 욕심을 버리고 빈한하지만 청빈하며 항상 한가하게 살기를 원하여 유학 최고의 선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2010.09.17 21:28남해

*2010.10.7.자 남해시대 25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