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세상읽기

어떤 친구의 변신

책향1 2009. 7. 9. 22:07

어떤 친구의 변신


녀석과는 근 20여 년 간 제대로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때, 70년대 후반 울산의 어느 대기업 직업 훈련소에서 만났다. 당시 필자는 별명이 “땜”이었다. 녀석과 나는 용접반에서 세상을 살아갈 준비를 했다. 열심히 전기 용접을 하며 전국에서 온 친구들과 어울렸다. 이 친구는 배구를 훤칠한 키만큼 잘했다. 알고 보니 서울의 배구 명문고 출신이었다. 키 큰 사람 싱겁다는 말이 있지만 참 좋은 마음씨의 소유자였다. 누구에게나 차분하고도 그 넓은 마음으로 대했다. 어려운 실정에서 과거 그나 필자나 군을 제대하고 취직하여 장가가라는 부모 성화에 못 이겨 직업훈련소를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6월에 제대하고 그곳에 입사하여 9월에 퇴직하고 말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친구가 기억에 나는 것은 그의 사람 됨됨이로 보아 당연한 이유다.

필자의 퇴사 이유는 당시의 어머니는 필자의 동생인 막내딸의 대학재학 중 사망으로 인해 막내가 되어버린 아들의 결혼을 간절히 바랐던 것이지만 필자는 꼭 대학을 가고 싶었다. 참고로 필자는 그 후 꼭 10년에 만혼하였다. 

퇴사하자마자 그해 9월 대구 고려학원에 등록을 하고 독서실에 들어갔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배운 영어 단어를 떠올리며 삼위일체를 배우곤 했다. 참 대단한 강사는 당시의 삼위일체 그 책 한권을 다 외워 교재도 없이 수업을 하는 것을 보니 놀라웠다.

요행스럽게 비교적 나은 예비고사 성적을 얻고 서울을 향해서 달렸다. 일본에서 35년을 사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고 불교 사상을 접하고 싶었다. 물론 아버지는 소 판돈으로 일본어 배우는 것이 매우 못마땅해 하셨다. 너무나 능통했던 일본어를 돈 주고 배운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셨던 모양이다.

무심한 필자는 4년 동안 어렵게 살던 누나집옆 반지하방에서 빈대로 살았다. 돈 쓰기 좋은 서울에서 시골돈은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어떨 땐 6개월을 하루 라면 두개로 연명하기도 했다. 물론 누나에게는 밥을 잘 먹었다고 했지만 평생 놈팽이 매형 때문에 누나도 힘겨운 생활을 했으므로 손 내밀기가 난감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런 상황이었고 매학기 등록금 때문에 칫솔 외판 장사를 하는 등 등록금 걱정을 단 한 시간도 잊은 적이 없었고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도리어 사치였다. 아르바이트 다녀 번 돈은 그 즐비하던 남산 밑의 “홍탁집” 아줌마에게 다 갖다 바쳐버렸다.

등록금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본 사귀던 아가씨는 3번이나 대신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다. 결국 졸업하던 해 흑석동 강변에 새로 생긴 예식장을 둘이서 예약했지만 그걸 아신 그녀의 부모들은 상견례를 요구했고 상견례에서 초라했던 필자 부모 형제를 본 그분들의 반대로 결국 헤어져 버렸다. 물론 그분은 필자가 졸업한 학교의 총동창회장이었다.

결국 대학 선배가 학교장으로 있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약혼자와 헤어진 충격과 적성에 맞지 않아 별 흥미를 못 느끼고 당시 인천사태에 연루되는 되는 바람에 교직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방황, 수염을 기르고 거지로 불교사상에 빠져 전국을 유람했다. 서울을 떠나면서 편지 한장 달랑 보내고 천안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 대학 4년간도 필자는 친구를 찾지 못했다. 아니 몰골이 문제라서 찾아가기가 곤란하여 86년인가 모래내 은좌극장 옆에서 전파상을 하던 친구를 만났다. 울산 대기업에서 나와 처음 본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찾지 않은 무의리를 그는 늘 그런 것처럼 책하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술을 마시고 그날 밤 그의 집으로 향했다. 벌써 결혼하여 두 딸의 아빠였다. 경상도 옛집은 모두 방 두 칸에 부엌하나의 1자형 집이었지만 그의 집은 ㅁ자 집으로 마당 가운데 큰 우물이 있었다. 그 다음 날 인근 개울에서 고기잡이를 했고 어른 팔뚝만한 잉어 몇 마리를 잡았다. 저녁 무렵 잉어를 삶아서 신나게 술을 마셨다. 가끔 갈증에 집 가운데의 큰 우물에서 차디찬 물을 퍼서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결국 밤에는 대문 밖에 있던 사랑채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지만 뱃속에서 부글거린다. 설사가 시작되고 소나무를 촘촘히 걸쳐 둔 재래식 화장실을 12번 다녔다. 그 잉어가 배에서 엉킨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힘도 없었다. 그 동안 한 번도 큰 설사를 하지 않았으므로 좋은 경험을 했다. 설사도 사람 기력을 잃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실감했다.

오늘 옛 추억을 더듬어 인터넷 검색을 하니 **시 의회 부의장이라 나온다. 물론 정치에 관심이 없던 친구였으므로 반신반의 했다. 다시 의회의원 검색을 하고 나온 사진은 분명 그 친구였다.

과거 시골이었던 곳이 몇 년 전부터 신천지가 된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동안 시로 성격 되고 그가 살던 곳은 “리”자를 떼고 동자가 붙어 있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를 어린이들까지 좋아 하던 모습은 능히 별로 정치성과는 무관하게 보였지만 시의원이 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의 변신이 너무 화려해 종잡을 수 없을 지경이지만 그 인품을 보면 차라리 당연했다. 일반적으로 선출직인 정무직은 인간성이 나쁘고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경우는 쉽게 보지 못했다. 친구의 인간성, 누구도 포용할 수 있을 듯 차분함은 그의 큰 키만큼이나 유연했다. 근 20여 년 만의 정식 연락을 먼 이곳 남해에서 기다려 본다. 그의 소개로 만난 여동생은 지금도 궁금하다. 못쓸 인간인 필자는 항상 죄만 짓고 살아간다. 이실직고, 석고대죄라도 해야 할 판국이지만 이제 시간이 너무 흘렀다.

그의 인품만큼이나 좋은 결과를 항상 얻기 바란다. 그리고 또 다른 그리움은 다음에 기술해야겠다. 

 

  2009.07.09 22:07 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