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세상읽기

소설가 고 정을병 선생의 안타까움

책향1 2009. 4. 12. 01:27

 

 

소설가 고 정을병 선생의 안타까움

 

김용엽(시인, 남해 향토역사관 관장, 남해문인협회 사무국장)


소설가 정을병 선생의 작고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빠른 세상이라 하지만 인터넷을 자주 검색하지 않으면 늦을 수밖에 없는 둔감한 자신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에 들리니 전 동국대 예술대학장 김흥우 촌장이  복사물을 잔뜩 쌓아 두고 한 묶음 가져가라신다.『월간 조선』2009년 4월호 기사 중 변호사 엄상익씨가 쓴 “소설가 鄭乙炳씨의 외로운 ‘昇天’”이란 제목의 법창일기 16쪽이었다.

필자가 처가 동네인 남해에 살게 되면서 6,70년대 고발문학의 기수 정을병 선생(이하 정선생)이 남해 출신이란 점을 알게 되었고 관심이 높아진 계기가 되었다. 필자가 정선생을 떠올리면 우선 두 가지가 연상된다.

소설가 협회의 “공금횡령” 사건과 『월간 중앙』의 필화사건이다. 사건 이후 엄상익 변호사가 이미 인터넷에 올린 글과 일요신문 기사에 정선생의 결백함이 들어나 있었고 필자의 처를 소개하신 소설가이자 『한맥문학』발행인인 김진희 여사로부터 소상한 이야기를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4년 전의 남해 문학 기행에서 내외분을 모신 적과 신문사 취재시 인터뷰(아래 사진 참조)하며 직접 뵈었다. 그 후 정선생의 2년 고향후배 김진희 소설가로부터 전달된 『정을병 문학전집(전8권)』을 남해중학교 도서관에 전달해 준 사실도 있으며 당시 지자체장으로부터는 책을 전달받고 고맙다는 인사도 들었다.

강단 있는 성품의 정선생이 일반적인 시각으로 ‘기행’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필자는 정선생의 강직한 인품에 더 무게를 두고 “시대를 거스른 작가적 양심 표현”이라 하고 싶다.

정선생은 남해 금산 보리암을 오르는 길 밑에 있는 작은 마을 벅시골 출신이다. 지금도 생가 터가 남아 있고 머슴을 거느린 작은 지주가 부친이었다. 그가 25여리 길인 남해수중 다닐 때 문학에 취미가 있던 부친의 영향으로 문학성이 깃든 많은 작품을 읽었다.

이미 중학 시절  그의 습작을 본 담임이 문인으로의 대성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가 논 세 마지기를 판 가수 지망생이기도 했고, 한 때 성직자의 꿈을 기르기도 했다. 

 정선생의 여정을 보면 남해 사람들의 강인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소설가로 ‘기행’으로 알려지는 점은 남다른 그의 정신력과 정의감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사고력은 말년까지 구파발 산 아래 허름한 구옥에서 연탄을 때며 휴대폰도 없이 평생 술과 담배도 배우지 않고 지낸 절약성에서 알 수 있다. 이제 고향에서 옮겨 심은 뜰안 40여년 된 황매화는 정선생의  애향 표현의 대상으로만 남았다.

 자원하여 국토건설단의 일원으로 춘천댐 건설에 투입된 경험을 토대로 1966년에 쓴 장편소설『개새끼들』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강원도 C시 부근에 있는 건설단에 입대한 주인공 멍게가 기간요원들이 말로만 애국을 외치면서도 힘없는 단원들을 등쳐먹자 이에 항거하여 그들의 폭력과 위선을 사실적으로 고발한 작품이다.

중편『카토의 自由』에서 고대 로마의 정치가 카토(Cato, BC95~46)를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 로마 정치사의 폭력 앞에 자신의 양심을 죽음으로 지키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1960년대 혼란과 부정부패를,『有醫村』에서는 돌팔이 의사들의 비리를 고발했다. 따라서 그는 누구보다 체험을 대단히 중시하여 대부분의 작품에서 문학의 허구적인 측면보다는 실존이나 현실적인 측면을 소설화하는 고발 문학의 기수로 평가받아 왔다.

그런 만큼 그는 반대 세력들의 질시와 반대에 직면했다. 종교 단체로부터 테러를 당하기도 했고 『월간 중앙』 기사로 인해 고향 남해 군민들로부터 화형식도 당하고, “5인의 솔제니친”인 문인 간첩으로 감옥에 가기도 했다. 2005년 6월 쯤에는 “공금횡령”이 보도되었다. "문화계 지원예산은 눈먼 돈인가"(7월 14일자 경향신문홈페이지 사설 인용) 식 잘도 갈겨쓴 보도에 시달렸다.

결국 이 모든 사건에서 정선생은 사실상 무죄 판결이 있었다. 다시 말해 장황하여 너무 상업적인 언론 보도나 주위의 질시에도 그는 별 다른 혐의가 사실 상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에는 잘나가던 언론들도 무슨 일인지 침묵했다. 이 나라의 내로라 하는 어떤 언론도 정선생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무죄 판결이 우연의 일치처럼 모두  진실로 밝혀졌지만 소탈하고 청렴하여  부도옹 같은 정선생은 사실 엄격한 청교도적인 윤리관의 소유자였다. 소설가협회 “공금횡령” 사건 역시 공금 횡령 부분이 무죄였다. 거액의 공금을 '횡령' 했다는 분은 300만원의 변호사비나  보석금도 없어 부인이 사채를 얻었고 개인적으로 겨우 도움을 받았다.  

이 사건도 사실은 소설가 협회 내의 그를 이해하지 못한 반목과 질시가 그 원인으로 보이고 그에 따라 수사가 시작되었다. 정선생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 실제 거액의 공금을 횡령하여 애인 카드 대금을 갚고, 부동산을 산 젊은 직원들은 거리를 활보할 때 70대 중반의 문단거목은 옥중에 있었다. 

문인들이 일단 형사 사건에 연루되면 결정적으로 거물들을 희화화하고 백안시하는 야릇한 만족감의  사회 풍조에  포퓰리즘 언론들이 가세하여 보도하는 바람에 원로 작가의 양심을 멍들게 했다.

"길 가는 누구라도 유죄로 만들 수 있다"는 과거  어느 검사의 독백만큼이나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어떤 사업체도 판공비에 대해 엄격한 법의 잣대에는 자유롭지 않다. 

선생 특유의 정의감으로 젊은 검사에 대한 거친 항의가 결국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괘씸죄"에 해당되었을지 모른다. 물론 정선생의 명성이 모든 것을 감쌀 수는 없었더라도 최소한 검사들의 논리적인 "공명심"보다  명석한 법리 해석만큼 약간의 감성적 소양만 더했었더라면 하는 필자의 큰 아쉬움이 남았다.

문단 내의 이권 싸움이나 파벌의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빚었는지 그 당사자들은 지금쯤  반성해야 옳다. 감투욕심과 개인적인 아집으로 무장한 일부 작가들은 원로작가의 말로를 보고 자신들이 옳았다는 엉터리 정의감으로  속으로는 웃을 비양심의 소유자들이다. 언론들도 일부의 주장을 확대 보도하여 평생을 쌓아온 원로작가의 명예에 금이 가게 했다.

 엄상익 변호사의 글 내용에서 처럼 “단 한 푼도 횡령한 적이 없는 노작가를 경험 없는 판검사들이 횡령범으로 몰아 낙인을 찍자 그는 곧 (불가촉의) ‘문둥이’가 되어 버렸다”. 평소 누구보다도 절묘한 해학으로 좌중을 편안하게 이끌던 매력은 자신의 작품처럼  맛이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세상의 "개새끼"들이 양심가를 도리어 "문둥이"로 만들고도 고소해 했다.

"개새끼"들의 논리가 통하는 사회는 양심이 죽은 사회다. 반성도 없는 도취감은 어떤 방향으로 또 표출될지 모르는 위험 그 자체이다.

 양심가를 인정하지 않고 문둥이로 만들어 대리 만족을 하는 일부 부류가  엄연히 존재하는 한 한국문단의 비극이고 그 와중에 언론이 있었다면  사회적 정의감이 너무 문질러 졌다. 어설픈 정의감으로 무장한 이 나라의 언론과 합세한 일부의 모함이 통할 수 있다는 나쁜 전례를 문단에 남겼다.

 

               사진 <필자사진> 생전의 정을병 선생과 필자 2006년 8월 23일. 

 

누구도 도와주지 않은 외로운 ‘문둥이’ 정선생은 결국 외아들이 그 충격으로 죽고 부인마저 스트레스로 잃었다. 정선생의 유언이 있었지만 한국문인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루어도 모자랄  마당에도 일부 문인은 그 고유의 아집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지근의 문인들이 질겁을 하게 하는 행위 등은 지양되야 마땅할  문단의 고질병이다. 정선생이  "반 모럴"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개조 시도가 도리어 문단의 큰 별, 그를 잃게 했다. 

중견 소설가 이을(李乙)은  지난 4월 9일 정선생의 49재 추모시「카토의 자유」에서

"남의 과오過誤를 디디고 올라선 교만驕慢과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복권을 외치는 목소리에 침묵하는 멸시蔑視와 /추종과 아첨 그리고 알랑거림 뒤에 배신背信과 /자신의 시야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로 간주하는 편견偏見이 /입으로는 사랑과 자비慈悲를 말해도 /행동은 늘 증오憎惡로 가득합니다."(포털 다음 이을의 블로그 「바람꽃 노을」에서 상제시 중 일부 인용)며 일부 문인들의 이중성을 개탄했다.

진실에 대해 그 흔한 변명도 제대로 않은 채 영원으로 간 정선생의 억울한 불명예를 씻을 사람은 피붙이로 외동딸만 남았다. 그리고 문단의 가라성같은 수 많은 문인들은 이 고독한 작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결국 정선생에 대한 영원한 빚으로 남겨졌다.

이것이 김흥우 촌장이 복사물로 대신하는 조그마한 이유였다. 수많은 외부의 질시와 모함도 이겨온 문학계의 "강단" 정선생은 결국 문단내부의 갈등과 자신내부의 병에 너무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스스로 가시 밭길을 걷고 정의를 온 몸으로 외치면서도 결국 그 열매를 보지 못했다. 도리어 정의에 대한 변명은 그에게 민망했을 것이다. 

  정선생은 마지막 난해한 작품을 출판해 주는 출판사도 구하지 못하고 결국 문명의 이기인 블로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유고작으로 『수행』( 349쪽/ 1만2천원 / 범우사)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스터 섬에서 마지막 자유를 맛본 선생은 이미 간암으로 저승을 그리고 있었다. 엄상익 변호사에게 맡긴 원고에서  정선생은  “이제 신과 한 덩어리가 된다”하며 모든 “인생 속에 들어 온 모든 경험은 (중략) 모두 내게 책임이 있고 (중략) 이글을 쓰면서 용서 받고 싶다”고 독백처럼 말했다.

 모든 것을 잃은 한국의 원로 작가는 누구에게 제대로 하소연 한 번 하지 않고 달랑 유고작 한편만 남기고 또 다시 외로운 저 세상으로 갔다. 그곳은 반목과 질시가 행세하지 않을 전혀 다른  세계가 그를 당연히 반기울 것이다.

대쪽 작가의 "영원으로 가는 신병훈련소"인 이 세상은 오늘도 대도들로 들끓고 있다.   

 

 

 

소설가  정을병 선생 약력

1934년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벅시골) 출생.이동초, 남수중, 남해농고,  한국신학 대학(54.4.13~57.3.30)과 미국 하와이 대학 동서문화센터에서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수학했다. 국도신문 등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대한가족계획 홍보부장, 지도부장 등을 역임.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소설가협회 사무국장,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위원장, 한국소설가 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61년 『현대문학』에 「부도」가 초회추천, 1963년 「반모랄」이 천료되어 문단에 데뷔. 개새끼들(1966), 말세론(1968), 유의촌(有醫村, 1968), 아테나이의 碑銘(1968), 받아들인다는 문제(1970), 도피여행(1971), 피임사회(1973), 병든 지구(1974), 城(1976), 한탄강(1976), 환상을 만드는 여인(1977), 일과 미소(1977), 흔들리는 신전(1977), 검은 천사의 미소(1977), 내 영혼의 외로운 목소리(1977), 주인 좀 빌립시다(1978), 명장 정기룡 火ㆍ畵ㆍ花(1978), 분단기(1979), 솟아오르는 하얀 새(1979), 인생을 팝니다(1979), 이브의 건넌방(1979), 종가에서 난 절름발이(1979), 고무신 거꾸로 신다(1979), 거짓말하는 당나귀(1979), 자살파티(1979), 옆으로 걷는 광대(1980), 인생을 살찌우는 강물(1980), 北我(1980), 오월놀이(1980), 인동덩굴(1980), 감언지의 기적(1980), 나비춤(1981) 등 창작집, 장편소설집, 수필집 등과 유작 수행(2009)등 총 72편의 소설이 있다.현대문학상(1967) 한국소설문학상(1976) 대한민국문학상(1987) 등을 수상. 훈장으로는 화관문화훈장(1990)이 있다.

 

2009.04.12 01:27  남해(2009.4.24일자 남해신문19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