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세상읽기

2007년 영월 대한민국 시인대회 이모저모

책향1 2009. 4. 1. 19:27

10월 5일 오전 10시 김삿갓 탄생200주년 기념 2007년 대한민국 시인대회 참석차 남해를 출발했습니다. 남해 진주 합천을 거처 88고속도로로 대구 금호인터체인지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안동에서 1박. 중앙고속도로로 영주, 풍기, 단양을 거쳐 제천IC로 나와 영월행. 처음 가는 영월이라 약간의 긴장감을 갖고 출발했지만, 낮엔 유리알 같은 햇살에 더웠고 밤엔 추워서 마음까지 오므라들었죠.

합천 전방 5km 구간에서는 동행했던 분의 졸음운전으로 황천길 일보직전까지 갔지만 그냥 죄없는 안전봉 다섯 개만 쓰러뜨렸구만요. 졸음운전의 원인으로 사천에서 먹은 유명 냉면집의 유난히 조미료 맛이 진했던 육수 탓인 것 같군요. 목이 말라 냉면 육수를 벌컥벌컥 다 마시고 출발하자 마자 저부터 졸기 시작했지요.

 

전국에서 1200여 시인들이 참석하여 많은 교유가 있었고 유익하고 아름다운 가을 이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난고 김삿갓을 말하면  일본 방랑시인 바쇼가 떠오릅니다. 아마 두 분의  인생역정이 너무 비슷하기 때문일 겁니다.

읽으시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김삿갓과 바쇼의 사전적인 의미를 잠시 소개해 올립니다.(아래 글 내용의 대부분은 다음사전에서 인용했습니다.) 부평초와 같이 덧없이 산 그의 해학과 풍자는 따를 자가 없을 것입니다.

 

김삿갓

 

본관은 안동. 김병연.자는 성심(性深), 별호는 난고(蘭皐), 호는 김립(金笠) 또는 김삿갓. 그의 일생은 여러 가지 기록과 증언들이 뒤섞여 정확하지는 않다. 6세 때에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평안도농민전쟁 때 홍경래에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자, 그는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으로 피했다가 사면되어 부친에게 돌아갔다. 아버지 안근(安根)이 화병으로 죽자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廢族)의 자식으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그는〈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제목으로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과시(科詩)로 향시(鄕詩)에서 장원하게 되었다. 그뒤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의 자식이라는 세상의 멸시를 참지 못해 처자식을 버려두고 집을 떠났다. 자신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면서 삿갓을 쓰고 방랑했으며, 그의 아들이 안동·평강·익산에서 3번이나 그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매번 도망했다고 한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현의 어느 땅(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살았고, 그뒤 지리산을 두루 살펴본 뒤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죽었다고 한다.

그의 시는 몰락양반의 정서를 대변한 것으로 당시 무너져가는 신분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풍자와 해학을 담은 한시의 희작(戱作)과, 한시의 형식에 우리말의 음과 뜻을 교묘히 구사한 언문풍월이 특징이다. 구전되어오던 그의 시를 모은 〈김립시집〉이 있다. 1978년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 기슭에 그의 시비(詩碑)를 세웠고, 강원도 영월에도  시비와 김삿갓 문학관을 세웠다.

 

스스로 읊다

겨울 소나무 외로운 주막에
한가롭게 누웠으니 별세상 사람일세.
산골짝 가까이 구름과 같이 노닐고
개울가에서 산새와 이웃하네.
하찮은 세상 일로 어찌 내 뜻을 거칠게 하랴.
시와 술로써 내 몸을 즐겁게 하리라.
달이 뜨면 옛생각도 하며
유유히 단꿈을 자주 꾸리라.

自詠
寒松孤店裡 高臥別區人

近峽雲同樂 臨溪鳥與隣 
치銖寧荒志 詩酒自娛身
得月卽帶憶 悠悠甘夢頻

 

바쇼

 

정식명은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본명은 마쓰오 무네후사[松尾宗房]. 일본 고유시인 하이쿠(排句)에 불교 선종의 정신을 불어넣고 이 형식을 널리 인정받는 예술 표현수단으로 만들어, 17음절 하이쿠 형식의 의미와 전통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일찍부터 하이쿠에 관심을 가졌지만, 처음에는 문학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고 고향의 봉건 영주 밑에 들어가 종으로 일했다.  1666년 주군이 죽자 사무라이(무사)의 지위를 버리고 시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수도인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나온 그는 시인이자 비평가로 차츰 명성을 얻었다. 1679년에는 '새로운 형식'으로 된 첫번째 시를 썼는데 그는 이 형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가을의 해질녘"과 같은 시구가 불러일으키는 소박한 서술적 분위기와 서로 관계가 없는 두 현상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기법은 바쇼 문체의 특징이 되었다. 당시 하이쿠는 사소하지만 인기있는 문학적 오락으로서 시중에 떠도는 덧없는 소문을 암시하고 형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진부한 하이쿠의 테두리를 과감하게 뛰어넘으려고 애썼으며 하이쿠는 참신하면서도 영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쇼는 불교의 선종 철학에 입각해 사소한 것 뒤에 숨겨진 가능성을 드러내고 삼라만상의 상호의존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세계의 의미를 단순한 시형식에 압축·표현하려고 애썼다.

1684년부터는 여행을 시작했는데 후에 이어진 숱한 여행은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여행 이야기는 여행길에 본 다양한 광경을 기록한 하이쿠만이 아니라 그 하이쿠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아름다운 산문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북부지방을 여행하고 쓴 〈오쿠노 호소미치 奧の細道〉(1694)는 가장 아름다운 일본 문학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여행하는 동안에 현지의 시인들을 만나 렌가[連歌]를 짓는 솜씨를 겨루었는데 솜씨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렌가를 그의 대표작으로 간주한다. 바쇼가 렌가를 짓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이어지는 시구 사이의 관계가 대체로 말장난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바쇼는 시인은 단순히 말솜씨만 좋아서는 안 되며 '향기'와 '메아리', '조화'를 비롯한 섬세한 이미지의 연상에 따라 시구를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쇼의 시를 묘사할 때 흔히 쓰이는 용어는 '사비'[寂]이다. 이것은 예스러운 것, 한적한 것, 빛바랜 것, 은근한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런 특징은 "국화 향기……/그리고 나라[奈良]에 있는/고색 창연한 부처들"과 같은 시구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시든 국화 향기는 옛 수도 나라에 있는 오래된 불상들, 먼지를 뒤집어쓰고 칠이 벗겨져가는 불상들의 시각적 형상과 어우러진다. 바쇼는 자신이 쓴 시의 온화한 정신과 일치하는 삶을 살면서,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화려함과는 대조적인 검소하고 소박한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사회와 완전히 관계를 끓고 '바쇼안'[芭蕉庵]이 있는 후카가와[深川]로 들어가곤 했는데 '바쇼안'은 자신의 필명을 따서 지은 소박한 오두막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바쇼의 인간성과 그의 시를 기려, 그를 하이쿠의 성인으로 추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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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1박하며 맛 본 식혜모습. 좀 특이 하죠. 일반적인 식혜에 당근과 무 등을 잘게 썰어 넣은 모습으로 여름철 물김치와 흡사하지만 단맛입니다. 동행했던 안동 분께 여쭤보니 안동 지방의 식혜랍니다. 참고로 포항 위쪽에서 이북까지 동해안의 생선식해(가지미 식해 등)는 발음 상 비슷하여 혼돈을 일으키지만 발효식품이란 점을 제외하면 전혀 다른 음식입니다. 25년 전 영덕출신 자치 동기생이 갖고 온 식해 맛에 놀란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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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에서 나눠준 안내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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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대회 이미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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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난고 김삿갓 문학관 입구에서 필자의 망중한. 주변에는 난고선생과 관련된 조각품이 많이 있죠. 제가 봐도 저의 모습이 마치 소도둑과 비슷하고, 단지 콧구멍만 뚜렷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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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6일 문학관 광장에서의 시인대회 모습. 낮에는 더워서 그늘로 피신을 많이 하더군요. 아직 낮은 그늘이 좋은 때죠. 때 아닌 양산부대가 등장했지요. 그리고 밤엔 산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바람에 마음까지 얼어붙었죠.

 

 

그늘에서 행사를 지켜보는 여러 시인들. 가을 햇살은 말만으로도 감상적이지만 그래도 피부가 타는 것은 싫은가 보죠. 좌로부터 김경식 한국문인협회 감사, 김경남 남해문협회장, 장춘시인, 장찬영시인,원숙시인, 필자. 대단한 글쟁이들이 유리알 같은 가을 햇빛이 두려워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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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모인 문인들이 청령포 단종유적지에서 자세를 가다듬고서. 송운하 선생님이 찰칵하신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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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인님도 보이시네요. 이건 제가 찍었죠. 송선생님 활달하신 모습이 참 아름다웠죠. 이러 모임 어디서 다시 할 수 있을련지요. 아 내년 남해국제탈예술촌이 개장되면 먼길이지만 오시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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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장에서 만난 소설가 김진희 선생,시인 반윤희 선생, 필자, 장찬영 선생의 모습. 나이 드신 분들이지만 정정하십니다. 특히 남해 출신으로 한맥문학 발행인이시고 한국문인협회 이사이신 김진희선생은 남해 처자를 저에게 소개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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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 단종유적지의 수령600여년의 소나무. 세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안다는 관음송입니다.갈라진 부분에서 단종이 앉아 상념에 잠겼다는군요. 실제로 보면 참 아름다운 모습의 거목이지만 저의 어설픈 사진 솜씨 때문에 관음송의 품위를 망쳤군요. 관음송에게 도리어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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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표석일까 하마비일까? 청령포 단종유적지 인근의 금표석. 흔히 시골 마을 어귀나 서원 근처에 많이 있지요. 하마비는 왕족, 충신 들을 모신 제각 앞에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로 말에서 내리거나 의관을 손보라는 뜻입니다. 이곳의 금표석은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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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입구를 지키는 개구리모형(?). 일본의 신사 입구에 많이 있는 고마이누(高麗犬)가 생각났지요. 보통 건물의 입구에 있고 그곳을 지킨다는 의미로 입구 양쪽에 있습니다. 일본의 신사 앞에도 반드시 있는데 이는 이름에서 보시듯  우리나라의 풍습을 그대로 베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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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대회 전경. 더워서 그늘로 피신을 많이 했군요. 중앙의 삿갓 모형이 보이죠.영월은 단종유허지와 장릉,난고선생 거주지와 무덤을 관광 자원으로 잘 활용하고 있더군요. 영월읍에서 이곳까지는 약 22km이고 난고선생의 무덤은 그곳 향토사학자에 의해서 발견, 고증되었답니다. 여인과 머물던 곳은 이곳에서 1.5km떨어진 산중에 있고 무덤은 문학관 입구에서 약 900m 오른쪽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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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로 들어가는 나루입니다. 이 나루를 지났을 단종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후송 유의양은 부수찬의 벼슬을 지내다 54세 때인 1771년에 남해로 귀양와서 순 한글로 쓴 기행문 남해문견록에서 하동과 남해사이의 바다를 건너는 심정을 적었지요. 아마 신분이 격하된 단종의 심정은 더 했겠지요. 

 

 남해 노량 나루를 건너다.
『귀양살이 장소로 정해진 남해라는 한 곳의 읍은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이기 때문에 노량나루를 건너가야 한다. 신묘년(영조 47년. 1771년) 2월 26일 오전에 남해 섬 건너편 하동군 노량마을 나룻가에 이르러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니 물의 너비는 한강의 서너 배나 되지만, 물이 그리 멀지는 아니하고 바람이 없어 물결이 잔잔하여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나루는 물결이 잔잔하고 호수와 같은 바다로서 순진이라고 하였다.
또 내가 태어나서 바다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구태어 무섭지는 아니하나 내 고향이며 서울인 북쪽을 바라보니 구름이 덮혀 있는 산들이 첩첩하고 임금이 계시는 서울이 천리 밖에 있는지라 육지 길로 올 때보다 마음이 달랐다.
배를 타고 노량나루를 건너면서 생각하기를 "옛 사람의 글에 평생에 충성과 신의를 가졌지만, 오늘날 풍파를 당하노라." 라는 한탄한 글귀를 외우고 사공에게 배를 바삐 저으라!
사공에게 재촉하여 배를 띄우니 푸른 바다의 물결은 넓고 편편하고 사면으로 티끌이 없어 배가 순풍으로 잘 가니 이런 때에는 육지 길에서 안장을 얹은 말을 타고 피곤하게 시달려 가느니보다 나았다. 이윽고 남쪽 나루에 배를 대니 비로소 남해 땅을 디디게 되었다.』

단종의 심정은 이 시에서 잘 나타나 있다.

 

蜀魂啼 山月底하니.(단종)

 

소쩍새는 슬피 울고 달은 산마루에 걸렸으니
임을 그리며 누각 머리에 기대어 섰노라
소쩍새여 네가 슬피 울면 이내 마음 슬퍼지며
네 울음소리 들리지 않으면 이내 슬픔 없으련마는
세상에 그리운 님과 생이별한 나그네에게 부탁하노라
춘삼월 달 밝은 밤에 소쩍새가 울거들랑
아예 누각으로 오르지도 말렸다.

                                             
蜀魂啼 山月底 相思苦 倚樓頭
爾啼苦 我心愁 無爾聲 無我愁
寄語 人間離別客 愼莫登 春五月
子規啼 明月樓

 

청령포는 단종이 세조 2년(1456)에 노산군으로 낮추어져 처음 유배되었던 곳이지요.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곳.

이곳에 2개월 머물던 단종이 유배되었던 해 여름에 홍수로 청령포가 휩쓸려, 단종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졌습니다.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므로, 조정에서는 영조 2년(1726)에 일반민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금표비(禁標碑)를 세웠고, 단종이 기거하던 곳을 의미하는 ‘단묘재본(端廟在本) 부시유지(府時遺止)’라는 비문을 새긴 비를 영조 39년(1763)에 세웠죠.

청령포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예로부터 ‘영월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입니다.

 

 

단종이 계셨던 곳을 향해 직각으로 꺽어서

절하는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 어문도라는 소나무가 놀랍습니다.

소나무도 예의를 차리고 있지요.

 

 

단종이 올라가서 서강을 내려다보고 시름에 잠겼다고 하는 노산대,

청령도 뒷산 층암절벽 위에 단종이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앞날을 근심하며

하나하나 쌓아올린 망향탑을 볼 수 있습니다.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청령포 맞은편 강둑에서 의금부사 왕방연이 단종을 그리워하면

지은 시에서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죠.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없어 냇가에 앉앗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절박했을 어린 단종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슬펐지만

소나무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과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수백 그루 소나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머리는 금새 맑아지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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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 아래의 제각 . 김경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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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앞에서 김경식 시인과 교수님
단아한 능으로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습니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고 능의 양식은 간단하지만 단아한 모습입니다.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고 다른 왕릉의 석물과 비교하면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에 속합니다.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습니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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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안내 팜플렛. 가을 냄새가 물씬 나는군요. 영월이 가을빛이라 한다면 이곳 남해는 봄빛이지요.강원도의 보석인 영월은 단종의 얼과  난고 선생의 시와 함께 영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