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고향에 대한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간다. 나이 먹어 간다는 의미이다. 그래도 아스라한 기억 속에 소소한 추억들이 소롯이 잊혀 지지 않은 것은 고향이라는 아득함이 마음에 아로새겨졌기 때문이다.
황량한 들판에 10여 가구 두껍지만 흙벽 사이 틈으로 새어 나오는 북풍 자락들 뜨겁던 방은 새벽이면 오돌오돌 떨기 이것이 겨울밤의 추억이다. 밤새 불어치던 바람이 잦아지면 비슬산 한 모퉁이에서는 햇살이 쏟아졌다. 이미 산으로 동네 사람들은 땔감 하러 떠난 이후이다.
김치와 된장은 겨울 내의 반찬으로 그래도 배는 굶지 않았던 것이 다행스럽다.
물이 들어 언 논에서 시켓또 타는 것이 일상이었다. 얼어 터진 손으로 산에 가서 베 온 아카시아 나무에 못을 박아 달리고 양말이 젖으면 소똥을 주워 불을 피워 말렸다. 방어선 였던 탓으로 가끔 총알이 불속에서 굉음을 내고 터져도 마냥 깔깔댔다.
신기못에서 내려오던 도랑은 여름에는 통발을 대고 겨울에는 얼음지치기 장소였다. 여름에는 홍수가 일상이었지만 밀려 내려오는 붉은 물에 땅콩과 죽은 돼지 가끔 사람도 떠내려 왔다.
이제 집은 길 확장으로 꼬불꼬불한 자연 도랑은 경리 정리로 옛 추억에 파묻혀 버렸다.
소죽 끓이는 물에 손을 불려 때를 벗기면 얘기 손 마냥 하얀 손으로 변신이 좋았다. 작은 방 쌀가마니 사이 둔 아버지의 소주 댓병은 늘상 꼬뿌가 거꾸로 주둥이에 놓여 있었고 굵은 왕소금은 한 접시는 항상 곁을 지켰다.
쥐가 어둠을 이용해 얼굴을 타도 쫓기만 하면 그만인 바쁠 것 없던 때 갯주머니에 든 흰쌀은 간식이었다. 늦가을 소죽 끓일 때 나는 배추 뿌리 익는 냄새는 고향의 향취마냥 그리운데 이제 맡을 길이 없다. 소죽에 넣어 데우는 정종은 아버지 심부름이었지만 그 때의 아버지만큼 든 나이에 다시 보는 정종은 그때와 달라 보인다.
비로나무 하러 미야까를 끌고 선산에 가면 아버지는 저 뒤에서 항상 따라 오셨다. 갓 말기는 사람과 함께 한 짐 실어 범안골 고개를 내려 소리 다리를 지나 방앗간 지나는 내릿막길에서 아버지는 저 뒤에서 힘들게 오셨다.
TV가 들어오고 드디어 지붕 개량이 되고 생전에 포장이 되겠냐던 길도 포장 되었다. 냇가 도랑을 깔아 둔 길에서 버스가 달리면서 튕기는 자갈로 대문은 가끔 소리를 냈고 빨래는 먼지를 덮어썼다. 과자 뽀빠이가 나오던 해 소리로 갓 배운 자전거를 타고 소리로 놀러가면 그 과자 한 두 봉지에 집을 처음지어 벽지도 바르지 않은 방에서 우리들은 키들거렸다. 그 때 친구들은 다들 성공해서 잘 살고 소먹이러 다니던 한해 후배 친구는 구마고속도로에서 비명에 갔다.
다리 밑에서 아이들은 이이들끼리 소는 소끼리 편안했다. 책보는 아이도 고도리하는 친구도 물론 있었고 숯으로 그린 야한 그림이 다리빨을 장식했다.
밤이면 옆동네 아이들끼리 연애가 무성했다. 어느 날의 남자들의 무용담이 우리 동네와 관련이 있을 때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지만 용기 없던 난 항상 빠졌다. 그 용기백배하던 아이도 그 옆 동네 여자 아이도 이제 보기 어렵다.
공장 굴뚝에서 연기 나는 것보다 고속도로 차가 씽씽 달리는 것보다 구부러진 하교길 갓 팬 나락을 씹으며 다니던 구부러진 논길이 좋다.
한적함과 정적 그것이 그리운 고향인데 왜 이리 바쁜 나날의 연속인지 마음의 여유가 없다. 멀리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다소곳한 고향 정취가 그리운데 이제 고향은 공장 연기 속에 파뭍여 있다. 양파 썩는 냄새도 땟국에 절은 어머니의 삼베 적삼도 그립다. 되돌릴 수 없는 아스라한 추억은 혼자만의 상흔으로 남아있다. 구불구불한 논두렁이 펴지고 하천부지는 사라지고 도랑엔 시커먼 염색페수가 흘러도, 하늘에 연기가 자욱해도 고향은 고향이다.
2009.1.24.10.13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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