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전에 졸업한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려니 50 넘은 필자도 미련스럽게 작고한 어머니가 자꾸 머리에 떠오른다. 최근 고위직들의 지나친 땅소유로 언론을 장식하지만 어머니는 밑으로 가슴이 나오는 땀에 젖은 홑삼베 적삼을 입고 여름 뙤약빛 아래 쇠갈구리와 망태기로 하천부지에 땅 한평 넓히려고 필자의 머리만한 돌을 골라내던 모습이 어련거린다.
추석 언저리 가을운동회에 음식을 학교옆 동산 묘지옆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눠먹던 기억도 새롭다. 삭힌 감이 달았지만 이젠 그맛을 보기 어렵다.
소심하고 용기없던 필자에게 지금의 감성을 남겨준 어머니다. 대보름날 정한수 한그릇 자그마한 밥상위에 올려 높고 달보고 절을 시켰다. 컴퓨터에만 매달린 요즘 얘들을 보면 과연 저네들이 커서 어떤 감성이 생길까 염려가 된다.
비슬산을 마주 보고 낙동강이 휘감아도는 대니산 산자락에 위치한 초등학교는 조그마한 저수지가 앞에 있다. 비슬산은 포산으로도 불리고 이름에 대한 몇가지 설이 있지만 필자는 벼슬이 비슬로 한자취음한 것으로본다.
초등학교 동창 동년배들의 상념은 비슷하리라. 현풍(포산) 곽씨 집성촌인 솔례마을과 가까운 지리적인 특성상 곽씨들이 반은 됐다. 6학년의 필자는 "앨범"이라는 말도 중학교가 입학정원에 "미달"됐다는 말도 의미를 몰랐을 정도로 우둔의 극치였다. 3,4학년 때 과거의 금빛 단추가 요란하게 달린 검정교복 같은 옷을 입고 다닐 무렵 양쪽 소매는 말라붙은 허연 콧물이 늘상 번들거렸다.
산수를 못했던 필자에게 어머니는 호미잡던 손으로 회초리를 드셨다. 말려둔 깻단으로 귀신놀이 하고 두번째였지만 이제 이 나이에 다시 매를 맞고 싶다.
많은 때가 겨울 철 손을 갈라지게 했고 바로 위 형과 소죽 끓이던 따뜻한 물에 불려 씻어내며 하얗게 변색되는 모습을 보고 키덕거렸다.
사춘기 옆집 딸부자집 맏딸과 달빛맞으며 어스름한 학교앞 연못 길을 걸으며 어렴풋이 연인 흉내를 냈던 길을 장년이 되서 다시 가니 왜 그 길은 내 기억만큼 작고 좁은지 어머니가 마지막 산등성이 옆으로 사라지던 길이었고 초조하고 여리던 마음을 달래주던 성황당(재실)은 아직 그대로다.
나만 변했을 거란 몽니도 없어지고 옆집 그 아이 중학교 때 소죽 끓이며 라디오로 듣던 노래라며 흥얼거린다. 노래제목을 옆에 와서 살며시 들려준다. "니가 이 노래를 엽서로 방송에 신청해서 나온 것이다.기억나나?" 이게 뭔 소린지 아물거리는 기억을 되살릴려고 해도 어렵다. 영 실망한 얼굴이다.
김이 모란모락 나는 샛노란 옥수수찐빵이 점심시간에 나왔다. 미공법 408조에 의한 4각 옥수수 빵이 그리운 건 추억이 그려내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 여학생은 모두 새마을 공장으로 몇몇만 진학의 영광을 맛보았다. 자갈 캐내던 어머니 덕에 수학 여행도 가고 대구로 진학하고 서울로 인생을 향해서 달렸다. 대학 합격통지를 받던 날 입학금 걱정과 함께 전공을 물어보던 아버지 '일본어"란 말 한마디에 바보같은 놈이라며 피곤한 몸을 돌아 누웠다.
일본에서 35년을 산 아버지가 돈 들여 "왜말"을 배운다니 싫어한 건 당연했다. 어머니는 "은행에서 돈세는 사람이나 호적 떼 주는 사람은 될 수 있제?"라고 연신 물었다. 이런 상념들이 머리에 어른거린다.
학교 어귀에서 옆 동네 동창을 만났다. 과거 동창회에서 보고 오늘 처음 보고 하는 말 "용*(필자이름)아 니가 늙어니 이렇네. 넌 고치(추)털 안�나?" 필자 속으로 이런 고연 동창년이라며 "와 안 쉬노. 난 거기도 염색했다"
이년은 키가 크고 남성적인 기질로 필자보다 두살이 위다. 언젠가 전화로 차보험들라고 해서 하나 들어줬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마냥 어려보이고 어슬픈 모습의 옛기억이 현재 모습과 상충되는 모양이다. 그러더니 한녀석 이 녀석은 6년 전 동창회 뒷풀이에서 남성적인 이 년이 '부르스'(블루스) 한번 같이 안춰준다고 칼을 빼든 부잣집 아들이다. 항상 왕질만 하려 들던 녀석이 그런 불상사가 있었지만 대구에서 수퍼한단다.
과거 참석한 한 두번의 동창 모임에서 술만 먹고 도망만 치던 필자를 보고 동창회 참석을 협박(?)하던 여자동창 멀리서 보더니 달려온다. 영 반갑지도 않은데 무슨 말로 날 해꼬지할련지 걱정이 앞선다. 그의 술버릇은 남들이 다 알아준다.
술 먹으면 야한 춤과 동시에 아무나 끌어안는 버릇으로 유명하다. 3년 전 노래방에서 슬거머니 나와 화장실에 갔더니 남자 대변보는 곳에서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앉아 소변을 신나게 보고 있었다. 나만 아는 비밀로 한지 오래지만 이제 실수하면 그걸 슬슬 터뜨리려니 애교아닌 애교만 부린다.
남해가면 회는 실컷 먹을 것같아 좋단다. 필자 "응 그래 넌 요즘 뭐하니?" "사업하지" 무슨 사업? "청춘사업" 하하 그녀는 2차가 가능한 서울의 룸싸롱 사장이다. "너 시간 나면 함 와라. 최고 이쁜거로 무료로 풀서비스" "아서라 시간없다."
'밥통"녀석이 보이네. 녀석 아직도 좋은 직장 생활 중이다. 녀석 덕에 언젠가 홍삼차는 잔뜩 먹었지만 좋은 품성으로 항상 웃는 낯이다. 3년 전 부부 동반으로 남해 행사에 참석했던 인물 좋은 '아낙네'는 책 출판 비용으로 얼마를 송금했지만 아직 출간을 하지 못해 미안하기 짝이없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좋은 글 부탁한다"고 했다.
이름에 글월 문자가 들어가는 동창은 지역 초등학교 연합 사생, 글짓기 대회에 여러번 같이 간 기억으로 필자에게 각별하다. 가끔 좋은 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영 글쓰는 환경이 아닌 모양이다. 남해군 홍보 잡지를 통해 필자와는 늘 상면을 하는 편이다.
이제 슬슬 폐교가 되버린 학교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본다. 어린 손으로 망태기에 흙을 파내고 지은 교사가 사라졌다. 널판지에 검은 칠한 벽의 양철지붕 교사는 간적이 없고 자리만 남았다.
당시 최신식으로 지은 화장실도 없어졌다. 거기에는 검은 고딕체 글씨로 "노크"라고 씌여진 문들이 있었다. 노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시대였다. 대변을 보면 한참 후 "대양"에 떨어지는 풍덩 소리가 매우 컸다.
다행이 식수펌프 옆 우람하던 조선 향나무는 살아있다. 콘크리트 벽에 갖힌 채 가지가 잘리고 외롭게 추억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40년 전 추억을 더듬는 필자에게 일렁이는 바람에 가지가 손사래친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안오셨다. 신문을 못보게 하던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셨다. 당시 신문 속의 만화와 소설만 자주 읽던 어린 필자에게 신문을 많이 보도록 하셨다. 그러면서 수업시간에 "여당'과 "야당"을 물으셨다. 필자의 답 '여당은 주권을 잡은 당이고, 야당은 그렇치 못한 당이다'라는 말에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정권을 잡은 당이라 해야 옳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그 인자함을 잊은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선생님의 여동생이 동창이니 가끔 듣는 소식으로 마음의 그리움을 채우곤 한다.
목이 마르도록 자잔한 옛 기억이 온 머리에 다가온다. 이제는 이런 아름다운 상념들을 어디 가서 채울꼬. 지나는 골목길 백목련 꽃잎이 스치는 바람에 떨어진다. 내머리에도 백목련 색깔만큼 흰 눈이 앉았다. 그 때의 어머니 만큼이나 나이가 찬 지금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원없이 보고싶다. 공부도 때가 있고 농사짓는 만큼 어렵다는 소리가 아직 귓전에 울린다.
나즈막한 논길 언덕 위로 어스름이 지면 마냥 뛰어놀던 유년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일상을 기름지게 하는 기억들을 뒤로 하고 오늘도 저 멀리 황량한 객향으로 정처없는 마음을 돌린다. 내일은 내일의 아침이 온다. 으스러진 추억이 마음으로만 남은 역사로 그 찬란함은 서서히 목마름으로 다가 올 운명이다. 과거는 오늘의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2008.04.2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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