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사에서 들리는 중생의 언어
김 송 배 (시인. 한국문협 시분과위원장)
가을이 깊어 간다. 분명히 가을의 이미지와 가을 산사의 이미지는 다르다. 가을은 결실과 더불어 풍요를 상징하지만,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 황량한 그 모습에서는 어쩐지 고독한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을 산사도 내적인 안온함 또는 정적인 모습에서 가을이라는 계절적 이미지와는 별개의 시적 발상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 가을 산사에서 들리는 중생들의 언어가 있다. 그것은 불심(佛心) 깊은 중생들의 간절한 기도이거나 지난 여름 체험한 시인들의 성찰과 기원으로 현현하는 언어라도 상관 없다. 모두가 이 호젓한 가을에 산사로 시적기행을 떠나보자.
아직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지
냄새나는 세상 몰라 하고
모로 누워서 달관한 몸으로 염불하고 있다
중생의 고행이 짐스러워
두 손 모아 덜기를 빌다가
지쳐 조용히 꾸중도 하다가
너무 말문이 막혀 굳어 버렸다
화려한 광배 베개 삼아
정면으로 서녘 하늘 바라보며
밝아 올 화엄세계 영생을 비는 건가
영롱한 장식 빛남 그지없는데
아직 원만한 얼굴로
허물 많은 중생을 부르며
일어나기 싫어하며 말없는 와불
--김용엽의「臥佛」전문
김용엽은 ‘말없는 와불’에서 어떤 상상력을 자신의 이미지로 수용했을까. ‘중생의 고행’과 ‘밝아올 화엄세계의 영생’을 현현하고 있다. 이렇게 재생된 상상력은 대체로 김용엽의 불심이 내면에 원류로 작용하겠지만, 보편적으로 시인들은 산사나 부처님, 그러니까 시적 대상사물에 대한 혜안(慧眼)이 그의 지적자양과 동시에 발양(發揚)되는 것을 목도(目睹)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중생들이 염원하는 고행의 해소나 영생을 위한 기원의 의지는 영혼과의 교감을 전제로 하면서 화엄경에서 말하는 ‘보살은 일체의 악을 인수하고 중생에 대해서는 평등하고 동요 없음이 천지와 같다’는 진실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내포(內包)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김용엽은 함께 발표한「용문사」에서도 이러한 내면의 탐색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가슴 편 법고 / 고승의 마른 기침으로 / 산사의 아침을 알리고 // 호젓한 산길 / 산벚나무 사이로 부처님 보이네 // 산자락 포근히 안은 / 자비로운 안개 속에 / 소슬한 바람이 동창을 열면 / 임 향한 길이 보인다.’는 어조(語調)는 그가 산사에서 감응(感應)하는 ‘부처님’과 ‘고승’과 ‘임’의 대칭에서 ‘길'이 보이는 그의 진실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의 끈을 놓자
자지러지게 모여들었다 다시 흩어지는 계곡의 속살거림
잔웃음 짓는 물결 속 산이 내려오고 구름이 내려오고 하늘이 내려온다
꿈틀거리는 길을 따라 풍경소리 바람기 잠재우고
만해 선생 숨결 살아 이는 백담사
나무와 침묵을 지키는 산과 마주 앉아 정을 통한다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목어의 눈
눈 속에 내가 없다
범종을 울려
때 쩔은 마음 내려 놓으라 귓불 간질이는
물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
수시로 변하는 맘들이 모여 쌓은 돌무더기 탑
허물 벗은 팥배나무가 보여주는 진실의 뼈대를
얄팍한 눈으로 읽어낼 수 없었다
무거운 보따리 놓으려 떠났건만 버거운 짐 하나 가슴에 안고 왔다
--이순정의「백담사에서」전문
이순정의 진실도 결국 ‘백담사에서’ ‘때 쩔은 마음’과 ‘무거운 보따리’를 내려 놓지 못하고 ‘버거운 짐 하나 가슴에 안고’ 돌아오는 중생들의 고뇌가 형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목어의 눈’ 그 속에 ‘내가 없다’는 것과 ‘진실의 뼈대를 / 얄팍한 눈으로 읽어낼 수 없었다’는 자신의 미흡한 지혜를 한탄하고 있어서 더욱 공감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순정이 함께 발표한「청량사」에서도 동일한 개념으로 이미지를 유추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바리바리 싸 가지고 있던 짐들을 풀어 놓는다’거나 ‘쓸데없이 붙잡고 있던 기우의 끈을 풀어 놓는다’는 화해가 ‘청량사’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백담사’와는 약간 상이한 시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이순정의 산사 체험에 대한 시간과 공간의 문제에 기인한다. 어떤 시점에서 그 산사를 찾게 되었는지, 또는 방문 당시의 진솔한 심경에는 어떤 기원이나 의식의 흐름이 있었는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논지가 성립한다. 그러나 중생들의 간절한 기원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어느 山寺에서 / 관목 우거진 은방울꽃 군락지에서 / 풍화되고 있는 바위 그늘에서 / 四柱도 없이 태어났다 / 무지개 휘어진 등쌀 비비어 타고 미끄러졌다.
--최승학의「소문」첫 연
이쪽 저쪽 집에 / 목탁소리보다 큰소리로 / 사랑을 넘나드는 / 파도 타는 簇子여
--이주철의「자연 풍(風)하면 생각나는 용문산 아래」끝 연
최승학과 이주철 역시 ‘산사’와 ‘목탁’이라는 언어를 대입함으로써 산사의 정경이 가미되긴 하지만, 앞에서 본 중생들이나 산사 자체에서 들리는 언어와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이 ‘지상의 왕좌보다 빛나고 승천보다 아름답고 세계의 지배보다 놀라운 것, 그것은 해탈(解脫)의 최초의 단계를 갖는 바 법열(法悅)이다’고 설한 바와 같이 ‘용문산 아래’에서 ‘목탁소리’를 듣는 것이나 ‘어느 산사에서’ 태어나는 시적 정황이 불심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본래 불심이란 대자비(大慈悲)를 말하고 무연(無緣)의 자(慈)로써 여러 중생을 섭(攝)한다는 관무량수경의 언지대로 부처님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설법을 하고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통해서 구원을 갈망하는 상호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상구보리(上求菩提-위로는 부처님을 모시고) 하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는 중생을 계도한다)을 실현하기 위해 고행을 했으니까.
하늘을 꿈꾸던 바다의 영혼 하나
대웅전 앞뜰에 솟구쳤다
단 한 번
스스로 울리지 못하나
솔바람에 기대어 존재를 자각한다
뎅그랑 뎅~
뎅그랑 뎅~
뎅그랑 뎅~
바람의 법문
들려주며
영겁의 꿈 이루는 몸짓
--趙京禮의「대웅전 앞 풍경소리」전문
조경례는 ‘뎅그랑 뎅~’ ‘풍경소리’의 청각 이미지를 살려서 ‘바람의 법문’과 ‘영겁의 꿈(영혼)’과 연결하는 이미지의 매칭을 순조롭게 형상화하는 중생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산사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은 이름 그대로 ‘스스로 울리지 못하’고 ‘바람에 기대어 존재를 자각’하면서 울린다. 그것이 조경례의 청각에는 ‘바람의 법문’이 되고 있다. 언어와 청각이미지의 조탁(彫琢)이다.
이렇게 산사와 관련된 작품들이 지난호『한맥문학』에서 많이 대할 수 있어서 가을과 함께 앓기 쉬운 고독이나 고뇌들을 잔잔한 언어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일찍이 유치환 시인은「나는 고독하지 않다」는 글에서 ‘절간으로 가면 물론 현실의 세계와는 너무나 눈감고 귀막은 격리요 도피이긴 하지만, 나 자신과 대좌하고 나 자신의 깊이를 자질하며 지낼 수가 있어서 좋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산사에서 반드시 부처님의 설법을 구하고 스님과 대좌하여 피안(彼岸)의 언어를 전수하는 것만이 중생의 언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는 지난 여름 강원도 백담사와 불탄 낙산사를 돌아본 일이 있다. 누구나 산사에 들리면 정적(靜的)으로 변한다. 숙연한 사찰에서 듣는 범종소리나 풍경소리는 찌들은 우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온하게 감싸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스스로 나 자신의 깊이를 성찰한다는 심리적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과 같이 복원중인 낙산사 옆에 이 사찰을 창건했다는 의상대사와의 교감을 작품으로 썼다.
저 멀리 동해 심해선(深海線)에서 바람 불어와 / 참선중인 의상대사의 눈시울을 적신다
절벽 아래 잔잔한 파도는 의미 있는 절규를 / 나의 가슴에 관류(灌流)시키고
주위의 소나무들은 그을린 채 / 그날의 아픔을 풀어 놓는다
물이 필요했다 부처님이시여 / 낙산사 절채가 모두 화염에 휩싸였는데도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 지척에는 바닷물이 출렁여도
번진 산불에 의상대사는 눈물만 흘렸을까
원통보전 앞 연지(蓮池)에도 물은 있었다 / 종루가 불타 범종은 녹아 흔적 없는
아수라(阿修羅)의 해변 언덕에서
관세음보살님이시여 / 아파도 아프지 않는 미소로
중생들이 지은 죄업을 물로 씻으소서 / 오늘도 의상대에서 대사는 의연히
동해 먼 해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졸시「물 詩 . 16-의상대(義湘臺)에서」전문
언젠가 파도소리를 듣고 ‘관음(觀音)’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다.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보는 것. 정말로 불가(佛家)나 선가(仙家)에서나 이르는 오묘한 진리라는 믿음이 지금도 새롭다. 관세음보살은 우리 인간들이 괴롭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정성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소리를 듣고 구해준다는 불교에서의 설법이 있다. 원통보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께 참배하고 땀 젖은 목덜미를 식혔다.
먼 바다에서 잔잔한 거품의 파도가 일렁이고 불탄 소나무들이 영양주사를 꽂고 있었다. 복원불사가 거의 완성되는 것 같다. 인재(人災)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加被力)이 미치지 못했을까. 중생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중생들의 언어는 여기에서도 들렸다.*
김 송 배 (시인. 한국문협 시분과위원장)
가을이 깊어 간다. 분명히 가을의 이미지와 가을 산사의 이미지는 다르다. 가을은 결실과 더불어 풍요를 상징하지만,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 황량한 그 모습에서는 어쩐지 고독한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을 산사도 내적인 안온함 또는 정적인 모습에서 가을이라는 계절적 이미지와는 별개의 시적 발상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 가을 산사에서 들리는 중생들의 언어가 있다. 그것은 불심(佛心) 깊은 중생들의 간절한 기도이거나 지난 여름 체험한 시인들의 성찰과 기원으로 현현하는 언어라도 상관 없다. 모두가 이 호젓한 가을에 산사로 시적기행을 떠나보자.
아직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지
냄새나는 세상 몰라 하고
모로 누워서 달관한 몸으로 염불하고 있다
중생의 고행이 짐스러워
두 손 모아 덜기를 빌다가
지쳐 조용히 꾸중도 하다가
너무 말문이 막혀 굳어 버렸다
화려한 광배 베개 삼아
정면으로 서녘 하늘 바라보며
밝아 올 화엄세계 영생을 비는 건가
영롱한 장식 빛남 그지없는데
아직 원만한 얼굴로
허물 많은 중생을 부르며
일어나기 싫어하며 말없는 와불
--김용엽의「臥佛」전문
김용엽은 ‘말없는 와불’에서 어떤 상상력을 자신의 이미지로 수용했을까. ‘중생의 고행’과 ‘밝아올 화엄세계의 영생’을 현현하고 있다. 이렇게 재생된 상상력은 대체로 김용엽의 불심이 내면에 원류로 작용하겠지만, 보편적으로 시인들은 산사나 부처님, 그러니까 시적 대상사물에 대한 혜안(慧眼)이 그의 지적자양과 동시에 발양(發揚)되는 것을 목도(目睹)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중생들이 염원하는 고행의 해소나 영생을 위한 기원의 의지는 영혼과의 교감을 전제로 하면서 화엄경에서 말하는 ‘보살은 일체의 악을 인수하고 중생에 대해서는 평등하고 동요 없음이 천지와 같다’는 진실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내포(內包)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김용엽은 함께 발표한「용문사」에서도 이러한 내면의 탐색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가슴 편 법고 / 고승의 마른 기침으로 / 산사의 아침을 알리고 // 호젓한 산길 / 산벚나무 사이로 부처님 보이네 // 산자락 포근히 안은 / 자비로운 안개 속에 / 소슬한 바람이 동창을 열면 / 임 향한 길이 보인다.’는 어조(語調)는 그가 산사에서 감응(感應)하는 ‘부처님’과 ‘고승’과 ‘임’의 대칭에서 ‘길'이 보이는 그의 진실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의 끈을 놓자
자지러지게 모여들었다 다시 흩어지는 계곡의 속살거림
잔웃음 짓는 물결 속 산이 내려오고 구름이 내려오고 하늘이 내려온다
꿈틀거리는 길을 따라 풍경소리 바람기 잠재우고
만해 선생 숨결 살아 이는 백담사
나무와 침묵을 지키는 산과 마주 앉아 정을 통한다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목어의 눈
눈 속에 내가 없다
범종을 울려
때 쩔은 마음 내려 놓으라 귓불 간질이는
물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
수시로 변하는 맘들이 모여 쌓은 돌무더기 탑
허물 벗은 팥배나무가 보여주는 진실의 뼈대를
얄팍한 눈으로 읽어낼 수 없었다
무거운 보따리 놓으려 떠났건만 버거운 짐 하나 가슴에 안고 왔다
--이순정의「백담사에서」전문
이순정의 진실도 결국 ‘백담사에서’ ‘때 쩔은 마음’과 ‘무거운 보따리’를 내려 놓지 못하고 ‘버거운 짐 하나 가슴에 안고’ 돌아오는 중생들의 고뇌가 형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목어의 눈’ 그 속에 ‘내가 없다’는 것과 ‘진실의 뼈대를 / 얄팍한 눈으로 읽어낼 수 없었다’는 자신의 미흡한 지혜를 한탄하고 있어서 더욱 공감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순정이 함께 발표한「청량사」에서도 동일한 개념으로 이미지를 유추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바리바리 싸 가지고 있던 짐들을 풀어 놓는다’거나 ‘쓸데없이 붙잡고 있던 기우의 끈을 풀어 놓는다’는 화해가 ‘청량사’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백담사’와는 약간 상이한 시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이순정의 산사 체험에 대한 시간과 공간의 문제에 기인한다. 어떤 시점에서 그 산사를 찾게 되었는지, 또는 방문 당시의 진솔한 심경에는 어떤 기원이나 의식의 흐름이 있었는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논지가 성립한다. 그러나 중생들의 간절한 기원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어느 山寺에서 / 관목 우거진 은방울꽃 군락지에서 / 풍화되고 있는 바위 그늘에서 / 四柱도 없이 태어났다 / 무지개 휘어진 등쌀 비비어 타고 미끄러졌다.
--최승학의「소문」첫 연
이쪽 저쪽 집에 / 목탁소리보다 큰소리로 / 사랑을 넘나드는 / 파도 타는 簇子여
--이주철의「자연 풍(風)하면 생각나는 용문산 아래」끝 연
최승학과 이주철 역시 ‘산사’와 ‘목탁’이라는 언어를 대입함으로써 산사의 정경이 가미되긴 하지만, 앞에서 본 중생들이나 산사 자체에서 들리는 언어와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이 ‘지상의 왕좌보다 빛나고 승천보다 아름답고 세계의 지배보다 놀라운 것, 그것은 해탈(解脫)의 최초의 단계를 갖는 바 법열(法悅)이다’고 설한 바와 같이 ‘용문산 아래’에서 ‘목탁소리’를 듣는 것이나 ‘어느 산사에서’ 태어나는 시적 정황이 불심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본래 불심이란 대자비(大慈悲)를 말하고 무연(無緣)의 자(慈)로써 여러 중생을 섭(攝)한다는 관무량수경의 언지대로 부처님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설법을 하고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통해서 구원을 갈망하는 상호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상구보리(上求菩提-위로는 부처님을 모시고) 하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는 중생을 계도한다)을 실현하기 위해 고행을 했으니까.
하늘을 꿈꾸던 바다의 영혼 하나
대웅전 앞뜰에 솟구쳤다
단 한 번
스스로 울리지 못하나
솔바람에 기대어 존재를 자각한다
뎅그랑 뎅~
뎅그랑 뎅~
뎅그랑 뎅~
바람의 법문
들려주며
영겁의 꿈 이루는 몸짓
--趙京禮의「대웅전 앞 풍경소리」전문
조경례는 ‘뎅그랑 뎅~’ ‘풍경소리’의 청각 이미지를 살려서 ‘바람의 법문’과 ‘영겁의 꿈(영혼)’과 연결하는 이미지의 매칭을 순조롭게 형상화하는 중생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산사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은 이름 그대로 ‘스스로 울리지 못하’고 ‘바람에 기대어 존재를 자각’하면서 울린다. 그것이 조경례의 청각에는 ‘바람의 법문’이 되고 있다. 언어와 청각이미지의 조탁(彫琢)이다.
이렇게 산사와 관련된 작품들이 지난호『한맥문학』에서 많이 대할 수 있어서 가을과 함께 앓기 쉬운 고독이나 고뇌들을 잔잔한 언어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일찍이 유치환 시인은「나는 고독하지 않다」는 글에서 ‘절간으로 가면 물론 현실의 세계와는 너무나 눈감고 귀막은 격리요 도피이긴 하지만, 나 자신과 대좌하고 나 자신의 깊이를 자질하며 지낼 수가 있어서 좋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산사에서 반드시 부처님의 설법을 구하고 스님과 대좌하여 피안(彼岸)의 언어를 전수하는 것만이 중생의 언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는 지난 여름 강원도 백담사와 불탄 낙산사를 돌아본 일이 있다. 누구나 산사에 들리면 정적(靜的)으로 변한다. 숙연한 사찰에서 듣는 범종소리나 풍경소리는 찌들은 우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온하게 감싸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스스로 나 자신의 깊이를 성찰한다는 심리적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과 같이 복원중인 낙산사 옆에 이 사찰을 창건했다는 의상대사와의 교감을 작품으로 썼다.
저 멀리 동해 심해선(深海線)에서 바람 불어와 / 참선중인 의상대사의 눈시울을 적신다
절벽 아래 잔잔한 파도는 의미 있는 절규를 / 나의 가슴에 관류(灌流)시키고
주위의 소나무들은 그을린 채 / 그날의 아픔을 풀어 놓는다
물이 필요했다 부처님이시여 / 낙산사 절채가 모두 화염에 휩싸였는데도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 지척에는 바닷물이 출렁여도
번진 산불에 의상대사는 눈물만 흘렸을까
원통보전 앞 연지(蓮池)에도 물은 있었다 / 종루가 불타 범종은 녹아 흔적 없는
아수라(阿修羅)의 해변 언덕에서
관세음보살님이시여 / 아파도 아프지 않는 미소로
중생들이 지은 죄업을 물로 씻으소서 / 오늘도 의상대에서 대사는 의연히
동해 먼 해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졸시「물 詩 . 16-의상대(義湘臺)에서」전문
언젠가 파도소리를 듣고 ‘관음(觀音)’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다.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보는 것. 정말로 불가(佛家)나 선가(仙家)에서나 이르는 오묘한 진리라는 믿음이 지금도 새롭다. 관세음보살은 우리 인간들이 괴롭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정성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소리를 듣고 구해준다는 불교에서의 설법이 있다. 원통보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께 참배하고 땀 젖은 목덜미를 식혔다.
먼 바다에서 잔잔한 거품의 파도가 일렁이고 불탄 소나무들이 영양주사를 꽂고 있었다. 복원불사가 거의 완성되는 것 같다. 인재(人災)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加被力)이 미치지 못했을까. 중생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중생들의 언어는 여기에서도 들렸다.*
출처 : 가을 산사에서 들리는 중생의 언어- 김송배(한국문협 시분과위원장)
글쓴이 : 책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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