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소개

한국사회를 위하여-수군작

책향1 2007. 6. 4. 16:38

한국사회를 위하여

 

수군작: 인터넷 닉네임으로 복거일과 진중권과의 논쟁으로 유명하며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다녀왔다.

 

 

국가의 소멸은 정치의 소멸이 아니다. 자본의 소멸이 경제의 소멸이 아니듯이, 마찬가지로 계급의 소멸이 사회의 소멸이 아니다. 국가-자본-계급의 소멸은 인류역사에서 <정치-경제-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표시하는 '부정적 또는 목적의식적인' 표현법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왔다.

지금도 그렇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 (시민)사회가 있다. 나는 국가의 소멸이 <성숙한 인격체들의 자유로운 연합체>=새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하고 바래온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국가가 있었듯이(국가는 계급지배의 장치이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있었다. 나의 짧은 지식으로 동북아 3국의 지난 지주관료노예제에서 그 사회는 혈연-종족의 공동체들이었다. 그 시기 국가가 <지주관료국가>이었듯이 말이다.

한국의 경우에 압축적 근대화는 낡은 지주관료국가를 타파하고 천민적이고도 기형적인 자본의 파시즘국가로 대체물로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국가는 한국 자본주의의 형성사가 보여주듯이 정당성을 상실한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의 계급지배 국가였다. 내가 일관되게 고수하는 하나의 의견은 <한국의 대자본-파시즘이 동종의 부르조아 내부에서도 억압적이며 파괴적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파시즘 국가는 당근 전통적인 혈연-종족공동체 또한 파괴했다. 국가는 일반적으로 항상 해당 시대의 사회와 갈등하고 상호보강한다. 따라서 한 시대 특정 국가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를 자신의 계급지배 하에 두기 위해 해당 사회구조를 통제하기 위해 변형시키고, 심각할 경우는 파괴한다(파시즘!!).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압축적 근대화가 바로 전통적인 한국 생산자 인민들의 종족-혈연공동체를 파괴하는 과정이기도 했으며, 그러나 이렇게 파괴된 전통적 봉건인민사회를 대체할 새로운 한국 시민사회의 미성숙, 미발육 과정기도 하였다.

자본주의에 전형적인 민주주의적 시민사회의 발육부진과 발육억제의 후과는 한국현대사 에서 엄청났다. 그것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 전통적 봉건농총공동체도 아니며, 자본주의적 민주시민사회도 아닌 이상하고 기형적인 <얼치기 사회>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을 무어라 부를 것인가? 이 <얼치기 사회>의 특이성은 무엇인가?

나는 그간 전통적인 봉건농촌공동체의 운영방식을 이래저래 많이 생각해 보았다. 봉건지주관료국가들의 지방통치기관들과 일정한 상호협력의 관계를 유지하는 자체의 향약과 마을좌장들 모임같은 것이 지난 조선시대 지역 공동체마다 발견된다. 이혼, 간통, 도둑질, 농업생산과정의 갈등들을 지방관리들 이전에 지역공동체 사회의 윤리도덕법률들이 일차적으로 관리하고, 판결하고, 조정하는 시스템이 있었던 것이다.

지주관료국가는 이들 지역공동체사회의 이러한 관리시스템의 권위를 봉건국가법체계와 갈등하지 않는 한 그 권위와 효율성을 보장해 주었다. 이것은 전통적 봉건시대에는 개인과 국가 사이에 혈연과 종족을 중심으로한 지역공동체사회가 존재해서, 국가와 개인의 직접적 충돌을 완충하고 조절해왔다는 이야기이다. 봉건적 개인들은 계급지배의 직접적 수탈과 폭력 이전에 이러한 지역공동체 사회의 기능으로부터 삶과 생존의 안정성을 보호받아 왔던 것이다.

이러한 봉건적 공동체사회가 탈농과 같은 급속한 압축적 근대화로 인해 해체되고, 천민 자본주의의 강도높은 직접착취와 수탈 속으로 개인들이 빨려 들어 가는 과정에, 도시 임금노동자들과 소시민들이 장차 주력이 될 민주주의적 시민사회 형성이 <파시즘> 국가의 출현으로 인해 기형적으로 비틀어져 버렸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 이제 무엇이 있어서, 한 개인의 삶과 생존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보호해 줄 것인가? 이 문제가 던져졌는 데, 아주 아주 기나긴 세월 동안 비참한 발육부진과 무응답의 시기가 있었을 뿐이다.

한국의 압축적 천민 자본주의화 과정, 정당성없는 정경유착의 지배계급들이 만들어낸 파시즘의 강력한 병영국가, 이 속에서 자기 삶의 일관성과 예측에 불안해 하며, 파시즘 국가의 불심검문과 연좌제와 불법연행에 덜덜 떨어야만 했던, 개인이 자기 삶의 안전을 위한 <묘한 보호 메커니즘>을 만들어 내었음을 나는 가장 먼저 읽어낸다.

도대체 하루하루가 어디서 어뒤로 튈 지 알 수 없는 극악한 공포 속에서 한국의 개인들이 절반은 정신나간 상태로 비이성적이 된 것은 이런 삶의 불안 때문이다. 기독교가 기형적으로 퍼저져나가고, <까라면 까>라는 병영공동체 규율이 개인의 육체와 정신을 학대하고, 공안기관의 신상조사에 한번 빨간줄이 그어지면 사돈팔촌까지 공직 상승이 저지되고, 그러면서도 <집 안에 실력있는 사람 하나만 있으면 안심되는>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어떻게 자기 삶의 안정성을 지킬 <보호 메커니즘>을 찾아내었던가?

그것이 무엇일까? 봉건지역공동체와 시민사회라고 해야 할 두 개의 정규 사회 양식 사이에서 이 기형적이고 묘한 <유사-사회적 장치 또는 공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일단 서술하자면 이렇다. 한국 천민자본주의 하에서 개인들은 그 누구도 문서화된 또는 <약속된> 규칙들을 믿지 않는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취직, 임금 등의 각종 계약에서도 <개인>으로서는 계약서를 별반 중시하지 않는다. 방대한 근대법률들이 있지만, <개인>으로서는 법보다는 주먹이고, 법보다는 <빽>이다.

외교와 통상에서도 문서의 구절 하나 하나가 갖는 <문자적 약속과 그 규정>의 중요성 보다, 상대방으로부터의 <실행의지>에 대한 정서적 확인과 일체감을 우선한다. 일체의 근대자본주의적 삶과 일상의 문서계약 및 작성행위는 별 가치없는 <요식행위일> 뿐이다. 물건을 사고 주고 받는 영수증의 자본주의적 게약 및 거래의 중요성은 자주 경시된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그래 주겠다>는 의지의 확인이며, 여기서 <노예의 도덕>이 발생한다. 굽신거린다!!

자그만 일상의 문제이든 아니면 국가적 변란의 문제이든 문제들이 생기면 언제나 이처럼 주변의 힘센 타자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우선된다. 발생한 문제의 최초부터 최후까지 <누가 약속 위반을 했나>를 그때까지 서로 주고 받은 약속의 이행여부로 판단키 보다, 문제가 터지면 이전까지의 약속 그자체들 자체가 무의미하고, 무효화되었다고 판단한다.

자기 문제를 주체적으로 자신의 이성과 실력으로 기존 약속의 이행여부의 사실에 입각해서 풀어내려는 노력보다는 <우리 삼촌에게 전화해 보고나서...>라는 식으로 타자에게 의존한다. 이러한 <우리 삼촌>이라는 존재는 여러가지로 변주된다. 친구의 사돈의 팔촌 중에 <검사>일 수도 있고, 선배의 후배의 친구의 선배인 <실력자>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연줄을 찾고 뒤지며, 자기 문제의 해결을 <실력있는 타자>에게 읍소해서 해결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 한국의 국가와 개인 사이에 개재된 거의 모든 문제의 해결방식이었다. 정규 시민사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문제해결하지는 않는다. 연줄과 빽이 아니라, <우리 삼촌>이 아니라, <삼촌과의 전화통화>가 아니라, 고용된 변호사나 해당 문제를 다루는 시민운동기구들이나 해당문제에 공감하는 시민들의 정치세력들이 개인의 문제의 해결자로 호출된다.

내가 이전 [15년 간의 디졸브]에서 <이제 비로소 한국 시민사회가 정립되었다>라고 즐거운 소리를 한 것은 [노사모]라는 시민들의 모임이 자신들의 의지로 노무현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세워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 노무현이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아가자, 유시민같은 이들이 <민주공화국의 위기>(^^) 운운하면서, 시민들의 정치행동을 조직하는 실천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 시민들이 더이상 빽이나 연줄과 같은 바깥의 <우리 삼촌>이 아니라 자신들의 스스로의 주체적 힘의 결집으로 자신들의 위기와 문제를 돌파하려는 소중한 발육과정에 있음을 나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민사회는 소중하다. 최장집이나 유시민의 지나친 <민주-반민주> 이분법은 우스꽝스러운 것이지만, 그 합리적 핵심은 <시민사회의 성장을 우리 손으로!>라는 정신에 있다.

그렇다. 기나긴 시간 동안 한국역사는 국가와 개인 사이의 텅빈 공허와 <우리 삼촌>이라는 비합리적 타자의 호출로 개인의 삶의 안정성을 보호하려고 몸부림쳐 왔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기형적인 <우리삼촌들의 사회>를 시민들 스스로가 청산하고, 자신들이 맺은 계약과 문서와 약속의 <원칙-상식-합리>를 존중하려는 태도의 성장은 아주 아주 값진 것이다. 이처럼 80~90년 대 시민사회의 발전과 성장은 뭐라 말할 수 없이 값진 것이다.

이제 만약 전쟁의 위기가 닥치자 바로 다음날 <우리삼촌 미국>에게 전화질을 한 이승만의 허약한 주체성의 위기는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부 시민주체들의 결속이 먼저 성숙하게 이루어져서, 이들의 반전평화의 정당성 위에서 전쟁으로의 발전 자체를 사전에 방지하거나, 아니면 미국의 반베트남 평화운동처럼 전쟁의 확산 자체를 종결짓는 역량들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삼촌에게 전화걸지 않아도 되는 사회>, 개인의 문제가 정상적인 약속과 합리와 상식 위에서 공정하게 판별되고 결판날 수 있다고 믿어도 되는 사회, 불신과 빽과 연줄에 의지하는 것이 개인들 사이에서 가련한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질타받을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가 <민주주의 시민사회>이다. 한국역사는 이런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사회주의 좌파들은 국가와 계급 그리고 자본의 소멸을 외치는 것이, 이러한 시민사회의 최고도의 완성과 개인들의 삶의 안정성이 합리주의와 원칙과 <인권과 복지의> 상식 위에 확고하게 서는 것임을 선전선동해야 한다. 계급정치가 <시민사회의 소멸>이라고 잘못 받아들이는 시민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공산당과 인민재판과 홍위병이 <시민사회>를 대체할 것이다라는 공포를 없애주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산당 일당독재를 없애고, 시민발의-시민소환-시민참여예산같은 직접참여 민주주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의 실권이 소수 몇몇 우두머리들이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들 자신들의 손에 쥐어질 것임을 납득케 해야 한다.

인민재판이 아니라, 법률을 위반한 자는 <인민의 적>이 아니라, 그 위반에도 불구하고 천부의 존엄한 인간이며, 해당 약속위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뿐임을, 그리고 그 과정이 공정한 변호시스템으로 합리적으로 진행되어야 함을 말해야 할 것이다.

홍위병이 없다는 것. 국가와 개인 사이의 전통적 중국식 종족공동체를 대체한 이 역시 비정상적인 나치나 검은 셔츠단같은 모택동식 파시스트들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오히려 활성화된 시민단체와 기구들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의 커뮤니티들의 합리적 행동규범 하에서의 토론과 비판과 상호정당성 경쟁만이 있을 뿐임을 알려야 한다.

사회주의 좌파들은 국가의 소멸이 시민사회 발전의 합법칙적 요구이며, 자본의 소멸이 노동자와 시민들의 복지 향상의 완성이며, 계급의 소멸이 모든 소수지배자들의 중앙집권적 억압과 적대적 갈등의 청산임을 알고 있다. 이것을 알고 있으며 이것의 물질운동의 담지자들이 사회주의 좌파인 이상, 사회주의 좌파가 시민사회 완성의 선봉들임을 공공연하고 긍지에 가득 차서 선전선동해야 한다.

노사모나 노무현류의 이상에 사로잡힌 현단계 시민상식론자들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는 능력과 실천은 그러기에 온전히 사회주의 좌파들의 몫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보다 강력한 시민사회의 발전은 시민상식론자들과 사회주의 좌파들 모두에게 유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과정의 헤게모니는 당연히 사회주의 좌파의 인권과 복지의 실현을 위한 역사적 정당성에 있다. 시민상식론자들의 자유주의적 한계는 그러기에 오직 사회주의 자파적 인권과 복지의 상식으로 견인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 사회주의 좌파들이 가져야 할 당당함과 앞서나감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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