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세상읽기

[스크랩] 부끄러운 양심들의 침묵(기사용)

책향1 2006. 12. 2. 11:43
부끄러운 양심들의 침묵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한 인물은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그는 전쟁 직후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았다. 1960년 이스라엘의 전범 추적자에 의해 붙잡혀 이스라엘로 비밀리에 이송되어 재판 끝에 처형되었다. 그는 고교중퇴 학력의 다소 소극적인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의외였다. 당시의 저널리스트들은 희대의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로서 그를 기대했지만 악마이기 보다는 차라리 무능한 인간에 가까웠다는 점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는 나치 친위대의 장교이면서 유대인 여성을 애인으로 두고 있었고 나치의 정강(政綱)도 모르고 군 입대도 친구들의 권유로 등 떠밀려 친위대에 들어갔을 정도이다.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이행했으므로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주어진 일에 충실하거나 근면한 점이 특이할 뿐이었다. 다만 그가 당시의 분위기나 먹고살기 위해 근면한 결과 출세 가도를 달렸지만 정작 그의 죄를 논할 때는 나치에 대한 현실 감각과 판단력이 결여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타인을 배려 할 줄 모르는 판단력의 무능이 자신의 죄의식을 무디게 했던 것이다. 즉 악에 대한 평범성이 그가 무능하게 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한 때의 자전거 소유는 TV가 그랬던 것처럼 부잣집의 상징이었다. 우리들 사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전거 도둑’이란 이탈리아 영화는 2차 대전 후 이탈리아의 사정을 사실적 영상으로 표현한 신리얼리즘 계통의 대표작이다. 자전거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도리어 자전거 도둑이 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고 고달프지만 살만한 세상임을 은유(隱喩)하고 있다. 흑백 영화의 한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실로 자전거도 큰 재산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과거 아파트 단지에서 세발자전거를 포함하여 3대의 자전거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필자는 다소 긴장감이 생기고 남의 것을 너무 쉽게 갖고 간다는 점이 걱정스러웠다. 그런 경험을 하고서도 흔히 길가다 눈에 띠는 버려진 자전거를 보면 누가 버린 자전거겠지 하고 무심코 지나친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장난삼아 갖고 갔다면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도 떠올랐다. 사소한 물건을 갖고 온 아이를 혼내고 물건을 돌려주는 것이 우선 장차 소도둑의 우려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정서에 인생에 공짜는 없다는 점과 도둑질은 나쁘다는 메시지를 주어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으려고 시도도 하지 않고 갖고 간 아이들도 돌려주려 하지 않는다면 악의 평범성으로 인해 선악 구분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경우를 생각한다면 결과적으로 민생 치안에 대한 우려를 숨길 수가 없다.
죄의식이 약한 아이들의 치기(稚氣)라도 치기로 받아 줄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조용하지만 준엄한 꾸짖음이 있어야 한다. 사소한 자전거 분실이 분노로 치달아 사회적인 불신을 증폭시키고 청소년들의 도덕 불감증을 양산시킨다면 일종의 사회자체의 병폐이다.
최근 ‘南海縣 正史’란 책이 발간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군청 담당부서를 찾아가서 담당자가 없다는 이유로 한참을 기다린 후 한권을 얻어왔다. 그 제목만큼이나 우리 지역의 새로운 역사적인 사실이 잘 기술된 내용의 책인 줄 알고 기대가 컸지만 전체적으로 정사(正史)이기보다는 차라리 기존의 사료를 모아둔 것에 불과했다. 일반인들은 ‘정사’라 하면 야사(野史)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를 하기 쉽다. 그러므로 기술 방법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제대로 된 우리 지역의 올바른 역사를 보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정서이다. 물론 “국가가 공식적으로 편찬한 기록들이기 때문에” (즉, 자료를 정사에서 인용했으므로) 제목으로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정사(正史)’란 제목은 아무리 호의적이라도 무리로 보인다.
2003년에 발행된 ‘南海郡의 抗日運動’의 경우도 관점에 따라서 기존의 연구 서적에 언급된 내용을 모아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웠다. 2001년 남해문화원에서 발행한 ‘花田史 硏究’란 책도 “硏究”란 제목을 붙이는 것보다는 ‘화전사 입문’(入門)이나 ‘소개’(紹介)라 해야 적합할 정도로 연구한 흔적이 부실했음을 당시 일부 뜻있는 군민들로부터 지적을 받아왔다.
열거한 3권 모두 기관에서 경비를 지원받아 출간하였음은 명확求? 관에서 군민들의 세금을 특정인사에게 지원할 때는 나름의 충분한 검토를 했겠지만 지명도나 인맥에 따라 심오한 검토도 없이 지원이 반복된다면 후차적으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묻고 싶다."눈 먼 돈 그저 먹기"나 또다른 의미의 (광의의) "선거 운동"이거나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특정인사에게는 쉬운 잣대로 지원한다면 공정성과 객관성 유지가 어렵다. 다시 말해 이러한 비판을 예상하고도 거액을 지원했다면 시스템에 문제가 있거나 다분히 의도적이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지원금을 받아서 출판한다면 최소한 새로운 역사적인 사실(史實)만을 모으거나 제목에 걸 맞는 기념비적으로 역사적인 서술을 하는 등 일말의 연구성(硏究性)이라도 보여야 하는 것은 최소한의 양심이다. 정사에 참고자료로 쓰일 만한 자료의 나열에 그치고 제목만 그럴듯하다고 연구 성과가 결코 높아지지 않는다. 지역 발전을 위한다면 순수 출판비만으로도 저작료 없이 염가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자신의 명성에 맞는 자세이며 스스로 명예를 쌓는 일이다.
타도시의 경우는 대학의 전문적인 부설연구소 등 객관성과 학술성을 인정받는 연구 단체에 집필 의뢰를 하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집필자도 학술적인 전문성과 열의를 갖추고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이미 발행된 사료집에 실려 있는 일부 내용을 중복해서 책으로 발행하다면 세금과 지면의 낭비일 것이다. ‘없는 것보다는 이런 것이라도 있는 것이 좋다’는 안이한 생각에 “역작”이라며 부적절한 관행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더욱 그런 관행을 부추기는 듯한 행위는 매우 위험한 ‘비겁한 양심’들의 행태이다.
이제 지역의 지성인들이 ‘고향 지상주의에 의한 낭만성’을 버리고 잘못된 관행이 평범성을 얻지 못하도록 작지만 강한 양심으로 입바른 소리를 해야 할 때다. 그것이 지역의 언론인을 비롯한 양심들의 시대적인 책무이고 진정 지역의 발전과 사회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학연, 지연, 안면에 얽매여 언제까지 눈치나 보며 잘못된 관행에 마치 중독된 것처럼 침묵만 할 것인지 그 비겁한 양심들에게 되묻고 싶다. 으슥한 술집에서나 할 말이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입바른 소리를 해야 할 때다. 그것이 지역의 언론인을 비롯한 양심들의 시대적인 책무이고 진정 지역의 발전과 사회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학연, 지연, 안면에 얽매여 언제까지 눈치나 보며 잘못된 관행에 마치 중독된 것처럼 얹침묵만 할 것인지 그 비겁한 양심들에게 되묻고 싶다. 으슥한 술집에서나 할 말이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출처 : 부끄러운 양심들의 침묵(기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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