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편
개관
조선 시대 이래 유교 사상이 한국 사회의 정신적 덕목이 되고, 조상에 대해 예를 갖추고 연장자를 대우하는 것이 중요한 일상이 되어왔다. 혈연으로 구성된 문중에서 조상을 찾고 예를 갖추는 것은 중요한 전통적인 일종의 문화 행사의 하나이다. 문중에서 조상을 위한 행사는 문중에서 결속력과 유대감을 높일 수 있다. 조상에 대해 예를 갖추는 것은 대부분 문중의 종가를 중심으로 행해져 왔으며 그 주역은 문중의 장손 즉 종손(宗孫)이다. 문중은 체계적으로 조직체를 구성하고 모든 행사를 주관하며 대내외적으로 그 문중을 대표한다. 일반적으로 문회(門會)나 화수회(花樹會)라 불리며 문중에서 조상을 모시고 곳을 재각이나 재실이라 한다.
혈연집단으로 구성되면 종중(宗中)이고 동성동본의 모든 혈족은 대문중이 되며 전국적으로 대단위 모임이 된다. 또한 중시조를 모시는 파문중(派門中)과 일정한 지역의 입향조를 중심으로 소문중(小門中)이 있다. 특히 남해의 경우 입남조(入南祖)를 중심으로 소문중이 많이 있다. 문중 안에는 대내외적으로 문중을 대표하는 문장(門長) 즉 문중 회장이 있고 실무를 보는 서무 또는 재무 격인 유사(有司)가 있다. 일반적으로 문중에서 하는 일은 주로 구성원들의 친목 도모는 물론 상부상조를 강조하고 조상에 대한 예식을 하며 문중의 자산을 유지 관리한다. 제사와 묘사 관리가 중요한 기능이고 친목을 도모하는 봉제사(奉祭祀)를 위한 행사를 한다. 문중 재산은 주로 묘택(墓宅)과 함께 있는 토지나 종가의 위토(位土) 등이 있는데 주로 문중 행사의 경비나 부조에 사용된다. 문중에서 집단적으로 예를 올릴 수 있는 장소 즉 재각이 필요하고 건립기금을 모으거나 유지 보수를 위해 힘쓴다. 재각은 제사를 위한 장소로 필요한 의례도구를 보관하거나 접견실이 별도로 있는 경우도 있다. 제각은 무덤 근처에 제사를 목적으로 새운 사당을 말하나 제각과 재실 등은 원래의 의미보다는 현재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악천후일 경우 묘제를 재실에서 지내기도 한다. 보통 제각과 재실은 선산(先山)에 있으며 주위에 선조들의 묘소가 있다.
삼동면에는 약 24개의 재실이 있으며 시조로부터 파시조 입남조, 소문중 파조를 중심으로 봉안하고 있다. 각 문중의 재실을 성씨별로 가나다 순으로 소개한다. 괄호안은 소재지 마을명이다.
1. 경주 최씨 관가정파(영지) 13. 경주 이씨 천휴당공파 희윤재(금송)
2. 성주 이씨 경무공파 (시문) 14. 전주이씨 소현세자파(금송)
3. 남양 홍씨 남양사(시문) 15. 경주 이씨 양평공파 학재사(금송)
4. 진양 정씨 첨정공파 경모재(시문) 16. 김해 김씨 삼현공파 재징재(금송)
5. 김해 김씨 판도판서공파 고암재(고암) 17. 김녕 김씨 충정공파 후죽사(봉화)
6 초계 최씨 초계재(동천) 18. 김녕 김씨 영돈영공파 학무사(삼화)
7. 경주 최씨 관가정파 문성재(수곡) 19. 김녕 김씨 영돈영공파 영모재(봉화)
8. 경주 김씨 수은공파 경운각(물건) 20. 밀양박씨 규정공파 국선재(금송)
9. 전주이씨 무림군파 경남사(물건) 21. 경주 최씨 관가정파 옥운재(대지포)
10. 밀양 손씨 오곡고파 우남재(지족) 22. 김해 김씨 삼현공파(화천)
11. 김해김씨 삼현공파(지족) 23. 진양 강씨 은열공파(내동천)
12. 진양강씨 어사공파 동성재(수곡) 24.전주이씨 무림군파 이문각(내동천)
1.영지 경주최씨(慶州崔氏)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모성재(慕省齋)
●재실 소재지 삼동면 영지리 2220-2 고잔마을안
●재실 건립일 1986년 10월
●입남시기 1519년 중종 을묘(中宗 乙卯)
●입남조 휘(諱) 옥동(玉東) 호(號) 여수(汝秀) 웅천현감(熊川縣監)통정대부(通政大夫)
●재실명 모성재(慕省齋) 목조와가 팔작지붕 정 3칸 측 1칸 약 12평
●부속물 돈의문(敦誼門.외삼문), 경내외 모성재사적비석, 모성재수호비, 공적비 3기(사진)
●봉안선조: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공(公) 이하 6위(六位)
●시향일 음10월 11일
●재실기
●기타 모성재창건사적비, 모성재수호비, 경주금공기념비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 관가정(觀稼亭) 청(淸)이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권신9權臣)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벼슬이 좌천되기도 했으나, 1374년 첨의중찬을 제수(除授)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갔고, 우왕 때 사복시정이 되어 명(明)에 가서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고 양주 풍양의 송산에 들어가 은거했으며, 이태조가 좌찬성을 제수하고 수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를 내렸다.
관리자 최영무 영지리 2397-2 867-4025. 010-3189-4025
모성재창건 사적비
영지 이 고장에 새 삶의 터를 옮아오신 덕자 립 할아버지께서는 입남 할아버지이신 옥자 동의 6세손이시고 문창후 최고운선생의 20세손이시고 향년 66을 일기로 이 세상을 마치셨으니 고룡산 건좌원에 안장하시었다. 오늘의 이후에 번창함은 그 유덕이 지극히 높으신데 연유한 바 이읍기로 온 문중은 일찍부터 재실 건립을 원하여 오던 중 지난 임인년에 11세손 금공이 건축자재를 자진 헌납하자 이에 호응하여 여타 자손들 도한 힘껏 정성을 다함에 이르러 이에 준공을 보게 되었으므로 이 모든 사연을 돌에 세겨써 백세의 뒤 일지라도 자손된 그 뉘 이를 거울삼지 않으랴는 것을 이름인저
단기 4296년 계묘 8월 초2일 세우다.
도목수 12대손 경두
모성재수호비(慕省齋守護碑)
금산(錦山) 영봉(灵峰)의 정기(精氣)와 산하기수(山河奇秀)하고 순풍(淳風)과 양석(良俗)으로 이름난 유서(由緖)깊은 이곳 남해(南海) 영지리(灵芝里)의 고룡산하(顧龍山下) 영지(灵芝)에 모성재(慕省齋)가 창건(創建)된지 어언(於焉) 25여성상(二十五余星霜)이나 당시(當時)엔 입영조(入灵祖)이신 휘(諱) 덕립(德立) 공(公)을 봉안(奉安)하고 선음(先蔭)을 추앙(推仰)하기 위(爲)한 후손(後孫)들의 중지(衆智)로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합심협력(合心協力) 창건(創建)되어 그 동안 후손(後孫)들이 흔모(欣慕)하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향제(享祭)를 모셔 오던 중(中) 서기(西紀) 1972년(一九七二年) 휘(諱) 덕립(德立) 공(公)의 고조(高祖)이신 휘(諱) 요정(堯正) 공(公)의 분묘(墳墓)를 고현면(古縣面) 산봉산(山峯山)에서 고룡산(顧龍山)으로 이장(移葬)하게 되므로서 서기(西紀) 1985년(一九八五年) 추계시향(秋季時享)에 맞추어 그동안 괴손(壞損)된 모성재(慕省齋)를 중수(重修)할 일과 나아가 조상(祖上)을 숭상(崇尙)하는 정신(精神)을 더욱 고양(高揚)하자는 뜻을 모아 중시조(中始祖)이신 문창후(文昌候) 휘(諱) 치원(致遠) 공(公) 관가정(觀稼亭) 휘(諱) 청(淸) 공(公)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요정공(堯正公) 은사(隱士) 휘(諱) 명일(命逸) 공(公) 가선대부(嘉善大夫) 휘(諱) 성립(成立) 공(公)의 위(位)를 함께 모셔 6위(六位)를 배향(配享)할 것을 결의(決意)하고 모성재(慕省齋) 중수추진위원회(重修推進委員會)가 구성(構成)되어 이를 추진(推進)하게 이르러 내외(內外)에 거주(居住)하는 모든 후손(後孫)들의 정성(精誠)어린 지성(至誠)이 수지(遂至)하여 서기(西紀) 1986년(一九八六年) 가을에 완공(完工)을 보게 된 것이다. 이는 오로지 선조(先祖)의 보살핌과 후손(後孫)들의 화합(和合)된 정성(精誠)의 결정(結晶)으로 믿는 바이다. 앞으로 이 모성재(慕省齋)의 수호(守護)야 말로 숭고(崇高)한 조상(祖上)의 선적(善跡)을 거울삼아 정신적(精神的) 요람(搖籃)의 전당(殿堂)으로 승화(昇華)시켜 자손만대(子孫萬代)에 영원(永遠)히 전승(傳承)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懇切)하여 여기 이 수호비(守護碑)를 세운다.
서기(西紀) 1987년 5월 일(一九八七年 五月 日)
모성재중수 추진위원회(慕省齋重修 推進委員會)
위원장(委員長) 봉률(鳳律)
부위원장(副委員長) 용덕(龍德)
계우(啓祐)
총무(總務) 종윤(鍾允)
간사(幹事) 중기(重基)
감사(監事) 봉렬(奉烈)
석순(石淳)
입영시조 경주최씨 종친회원 일동근립(入灵始祖 慶州崔氏 宗親會員 一同謹立)
2.시문리 성주이씨 (星州李氏) 경무공파(景武公派)
●재실 소재지 삼동면 시문리 1203
●재실건립일 1997년
●입남시기 1456년 용인에서 산청을 거쳐 입남(入南)
●입남조 휘(諱) 계순(季淳) 자(字)가 형중(亨仲)이고 고려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휘(諱)가 조년(兆年)이고 시호(諡號)가 문열공(文烈公)인 분의 6세손(世孫)
●재실명 경무공파(景武公派) 재각. 콘크리트스라브조 1층 정, 측 3칸 약20평
●부속물 경내 실묘비 비석 3기(사진)
●봉안선조 입남조 휘(諱) 계순(季淳) 등 16위(位)
●시향일 음10월 10일
●재실기 이동면 초양(草陽)의 달구산(月鉤山)하의 묘전비와 후손인 이완수씨의 전언에 의하면 10여 년 동안 문중의 논의 끝에 실묘(失墓)한 입남조의 다섯 아들 중 막내인 용(龍)과 그의 아들인 진산(震山), 진흥(震興)의 비를 경내에 세우고 종친회 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기타
시조(始祖)는 순유[順由 신라(新羅) 56대(代) 경순왕(敬順王) 재상(宰相)]이고, 16세(世) 시(諡) 경무공(景武公) 휘(諱) 제(濟)가 조선(朝鮮) 이태조(李太祖)의 부마(駙馬)로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7세(世) 이전에는 거의 실전하였지만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아우 돈유(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손위(遜位)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 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경북 성주읍 경산리(星州邑 京山里)에 옮겨 정주(定住)하였으므로 관향(貫鄕)이 정해 졌다. 1930년 남해화수계(南海花樹契)가 결성되고 이후 1972년 종친회(宗親會)로 개칭(改稱) 발전(發展)하였다.
관리인 이완수867-3388 전총무 이정원867-3553
3. 시문리 남양홍씨(南陽洪氏) 문정공파(文正公派) 남양사(南陽祠)
●재실 소재지 삼동면 영지리 303 시문 마을 후방
●재실건립일 1977년 4월 19일
●입남시기 1600년경
●입남조 당홍계(唐洪系) 문정공파(文正公派) 중학(仲鶴). 시조 휘(諱) 은열(殷悅)의 33세손(世孫)
●재실명 남양사(南陽祠) 콘크리트조 와가 전3칸 측2칸 약20평
●부속물 정문 외삼문 콘크리트조 와가, 경외 공덕비 1기
●봉안선조 입남조 중학(仲鶴) 외
●부속물 솟을 대문. 콘크리트 와가
●시향일 음10월 13일(음10월 첫째 일요일)
●기타
남양홍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이 있다. 당홍은 멀리 고구려 때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홍학사의 후예다. 토홍은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을 지낸 홍선행의 후손이다. 당홍과 토홍이라는 칭호도 바로 이러한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한다. 두 계보의 근원이 같은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토착파인 토홍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00년 이상 길다. 남양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의 지명에서 유래 했다.
●재실기
관리인 홍한일 영지리 1154-2 867-3428 홍인표 867-0537
4.시문리 진양정씨(晉陽鄭氏) 첨정공파(僉正公派) 경모재(敬慕齋)
●재실 소재지 삼동면 시문리 1032-2
●재실건립일 1996년 8월 18일
●입남시기 1471년
●재실명 경모재(敬慕齋) 콘크리트 와조 전, 측 3칸 16평
●부속물 경내 공적비 1기, 화장실
●봉안선조 중시조 중공(仲恭)부터 24세(世)
●입남조 휘(諱) 확(確) 임(任) 현신교위(顯信校尉) 자(字)가 성오(聖五) 시조 휘(諱) 중공(仲恭)의 10세손(世孫)
●시향일 음 10월 15일( 11월 첫째 일요일)
●재실기 후손인 정두삼씨는 문중(門中)의 결의로 다년간 건립 자금을 모아 완공했다고 한다.
●기타
남면 석교리의 묘전비문에 의하면 입남조 휘(諱) 확(確)은 조선조 태종(太宗)이 남해현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의 사족(士族)들 중 여덟 성씨를 뽑아 이곳에 살게 하고 그중 재주와 행실이 훌륭한 분을 뽑아 훈도(訓導)하게 하였는데 그 중 으뜸이었다.
관리인 정두삼 영지리 982 867-3735. 019-558-3735
5.고암리 김해김씨(金海金氏) 판도판서공삼현파(版圖判書公三賢派派) 고암재(鼓岩齋)
●재실 소재지 고암리(鼓岩里) 1646 고암마을 안
●재실건립일 1983년
●입남시기 1500년 후반 경(추정)
●재실명 고암재(鼓岩齋) 콘크리트 와가 팔작지붕. 15평
●부속물 정문과 객사 3칸 콘크리트조 스레트지붕
●봉안선조 입남조 이하 14대손
●입남조 휘(諱) 호(鎬) 중조 관작(官爵)이 판도판서(版圖判書) 정3품관(正3品官)과 봉익대부(奉翊大夫) 종2품관(從2品官)인 휘(諱) 관(管)부터 9세손(世孫) 시조 휘(諱) 수로(首露)부터 57세(世) 아버지는 휘(諱) 대장(大壯)이고 호(號) 율리(栗里)이고 창녕(昌寧) 현감(縣監)이다.
●시향일 음 10월 15일
●재실기
●기타
재실기나 비문이 없으므로 김종기씨의 전문에 의하면 해방 전 1943년에 목조와가 3칸 건물을 세웠으나 허물어져 1974년 콘크리트 스라브조로 재건했지만 문중들의 의견과 건립자금을 모아 1983년 현재의 건물을 완성했다. 오래된 초석 4개가 정원에 남아 있다.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는 김해김씨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휘(諱) 관(管) 파(派)의 별칭이며, 판도판서공파란 중조(中祖) 관(管)이 고려 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라는 벼슬을 했기 때문에 그 이하 자손들을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또는 판도판서공 휘관파(版圖判書公 諱管派)라고 한다.
조선 정종 조에 김해김씨를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하였고 절효(節孝) 공(公) 휘(諱) 극일(克一), 탁영공(濯纓公) 휘(諱) 일손(馹孫), 삼족당(三足堂) 휘(諱) 대유(大有) 등 3인을 가리켜 청도삼현(淸道三賢)이라 칭하였으며 한집안에서 4대(四代)에 걸쳐 3현인(賢人)이 났다는 것은 고래(古來)로 매우 드문 일이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후손(後孫)들을 삼현파(三賢派)라 불렀다. 판도판서공 휘관파(삼현파)는 5세(世) 절효공(節孝) 공(公) 휘(諱) 극일(克一)의 6형제로부터 군수공파 휘(諱) 건(建), 집의공파 휘(諱) 맹(孟), 한림공파 휘(諱) 용(勇), 진사공파 휘(諱) 순(順), 녹사공파 휘(諱) 인(靭), 진의공파 휘(諱) 현(鉉)등 6개 지파(支派)로 크게 나뉘어져 있으며, 그 외 군수공(郡守公) 휘(諱) 익(益)파(派), 통덕랑공(通德郞公) 휘(諱) 무(武)파(派)가 있다.
극일(克一)은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파)의 파조인 관(管)의 5세손(世孫)으로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어려서부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조모가 병으로 눕자 단지(斷指)로 피를 흘려 넣어 그 병을 낫게 했다. 뒷날 조모(祖母)가 세상을 떠나자 묘막(墓幕)을 지어 시묘의 예를 올렸고 조부상에도 조석(朝夕)으로 성묘하여 정성을 다하니 호랑이가 나와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종 때 조정으로부터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다.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인 파조는 일찍이 벼슬이 판도판서. 국자사에 이르렀는데, 충선왕 때에 누차 부도(불교)를 배척하고 학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시키자고 상소하였다. 고려말 (高麗末) 불교배척에 앞장섰던 저명한 유학자 중의 한명이다.
관리인 김종기 영지리 1464 867-0242 018-303-3172 홍종학 019-498-3700
6. 동천리 초계최씨(艸溪崔氏) 통정공파(通政公派) 초계재(艸溪齋)
●재실 소재지 동천리(洞天里) 마을
●재실건립일 1991년 7월 28일
●재실명 초계재(艸溪齋) 콘크리트조 와가 전4칸 측 2칸 2층. 1층은 접견실과 식당(각20평)
●부속물 정문 콘크리트조 와조 외삼문. 기념비, 창건비 표지석 경내 외 비 3기(사진),
●봉안선조 입남조 휘(諱) 종국(宗國) 이하 92위
●입남조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종국(宗國) 시조 휘(諱) 용궁(龍宮)의 15세손(世孫)
●입남시기 명묘(明廟) 을축년(乙丑年) 서기 1555년 입남조 출생 이후 추정
●시향일 음10월15일
●재실기
●기타 초계재(艸溪齋)는 전국적으로 잘 다듬어진 재각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견문을 하며 부러워하고 있으며 동천리(洞天里)에서 물건리(勿巾里) 가는 도로 옆 좌측(左側)에 있다. 최씨 성은 진한6부의 성중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생긴 성이며 중국의 270여개성중 4번째로 많은 성으로 2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성씨이다. 최씨의 본관(本貫)의 현재 기록은 약 80여 본이 기록되었다. 우리 초계 최씨 본향(本鄕)은 현 경남 합천군 초계면((艸溪面)의 지명이다.
초계최씨(艸溪崔氏)의 내력은 신라개국 전 육부(六部)의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공이 사성(賜姓)하여 득성(得姓)의 원조로 하며 그의 24손(孫) 고운(孤雲) 치원(致遠)공(公)이 경주최씨의 시조요 치원공의 4세손(世孫) 휘(諱) 순작(舜爵) 공(公)이 전주 최씨(全州)의 시조(始祖)이다. 전주최씨 7세손 휘(諱) 경공의 아들인 팔계군 문제공 용궁(龍宮)이 전주최씨 8세손이고. 분파되어 초계최씨 시조(始祖)로 그 세계를 이여 오고 있다
관리인 최인주 동천리 1287 867-0411
기념비(紀念碑)
남해초계 최씨종각 (南海艸溪 崔氏宗閣)
서기(西紀) 1984년(一九八四年) 10월(十月)21일(二十一日) 28세손(二八世孫) 최영주(崔泳峀)의 적극적(積極的)인 주도(主導) 하(下)에 당시(當時) 중조(中祖) 입남(入南) 3대(三代) 중조(中祖) 초대(初代) 최종국(崔宗國) 2대(二代) 최대린(崔臺麟) 3대(三代) 최억립(崔億立) 묘(墓)가 남면(南面)과 서면(西面)에 산재(散在)한 것을 동천리(洞天里)로 이장(移葬)한 이후(以後) 절충(折衝) 삼동면(三東面) 후손(後孫)이 매년(每年) 시제(時祭)를 거행(擧行)하고 혈통(血統)을 빛내신 4대(四代) 최헐(崔歇) 수문장군(守門將軍)께서 선조대왕(宣祖大王) 28년(二八年) 임진왜란(壬辰倭亂) 7년(七年) 종전(終戰) 후(後)에 선조원종공신록권(宣祖原從功臣錄券)의 훈장(勳章)을 받으신 그 공덕(功德)을 길이길이 간직하며 문중(門中)들의 정성(精誠)과 노력(努力)으로 이 사랑스러운 종각(宗閣)을 건립(建立)하고 선조(先祖)를 숭앙(崇仰)하고 종친(宗親) 상호(相互) 우의증진(友誼增進)과 협조발전(協助發展)시키는 뜻 깊은 행사(行事)를 기념(紀念)하고자 한다.
서기(西紀) 1991년(一九九一年) 6월(六月)
재각건립추진위원회 (齋閣建立推進委員會)
위원장 (委員長) 최인석(崔仁石)
위원(委員) 최은주(崔銀柱 최주홍(崔炷洪) 최종근(崔宗根) 최병근(崔炳根) 최성진(崔城辰) 최창민(崔昌敏) 최인주(崔仁注) 최학주(崔學柱) 최태수(崔太秀) 최영배(崔泳培) 최일해(崔日亥) 최천운(崔千云) 최흥백(崔興栢) 증(贈)최현주(崔賢柱) 근서(謹書)
최헐 수문장군 선조원종공신록권(崔歇 守門將軍 宣祖原從功臣錄券)
만력(萬曆)33年(1605년) 선조(宣祖) 38년 4월16일(四月 十六日) 행도승지(行都承旨) 신(臣) 신흠(申欽)은 삼가 전지(傳旨)를 받드나이다. 전지(傳旨) 나라에 어려움이 많아 안정이 안 될 때에는 모든 힘을 중흥(中興)에 쏟아야 한다. 그러나 공(功)이 있으면서 드러내지 않는 자는 원종(原從)에 추은(椎恩)되어 모두 신흥(新興)에 싣고 모든 방식을 구장(舊章)에 따랐다. 생각컨대 왜구들이 우리의 육량(陸梁)을 침범하여 왕(王)께서 서토(西土)를 파월(播越)할 때에 호(虎)와 시(豺)처럼 종횡(縱橫)하여 종사(宗社)는 몽진(蒙塵)되고 산천에 발섭(跋涉)하시며 군신(君臣)들은 노숙(露宿)하는 참견(參見)을 어찌 차마 말조차 할 소냐. 하늘이 당(唐)을 흥(興)하고져 임금은 백성(百姓)을 구제했고 백성들은 진(晋)을 구하고져 신하들은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다. 이 싸움은 다행히 이기고 돌아와서는 공훈(功勳)을 솥에 새겼도다. 여기에 경사대부(卿士大夫) 그리고 사서인(士庶人)들이 때로는 무열(武烈)을 휘날렸고 때로는 군수(軍需)를 도왔다. 창을 잡아 구치(驅馳)하면서 자신을 바치고 병사들을 이끌어 전벌(戰伐)하면서 목숨을 들린 모든 장졸(將卒)들을 여기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하도자 하오니 가벼우나 무거우나 모두 한때의 공로(功勞)를 나눔이다.
너희 아들 너희 손자들 만세(萬世)의 안락(安樂)을 누리도록 이에 감(敢)히 기록하여 모두 알게 하느니라.
7. 수곡리 경주최씨(慶州崔氏)관가정파(觀稼亭派) 문성재(文聖齋)
●재실 소재지 수곡리 음지마을
●재실건립일 1997년 6월
●재실명 문성재(文聖齋) 콘크리트조 와가 정 3칸 측 2칸 20평
●부속물 문성재수호비 1기
●봉안선조
●입남조
●입남시기
●시향일 음10월15일
●재실기
●기타
●관리인 최명훈 지족리 101-1 867-2684
문성재수호비(文聖齋守護碑)
문성재 창건일(文聖齋創建日) 1997년 6월 일(一九九七年 六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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