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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동면지 종교편(집필중) 복사금지

책향1 2006. 12. 1. 10:37
 

삼동면지 종교단체편


가. 불교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전래에서 시작되었다는 북방 전래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東晋)의 고승 도림(道林)이 고구려 승려에게 청담격의(淸談格義)불교의 대표자인 법심(法深)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372년 이전에 이미 문화교류의 방편으로 민간경로로 전파되었음을 알게 한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한 것은 384년(침류왕 원년 9월)에 고구려 보다 12년 후다. 동진(東晋)으로부터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궁으로 와서 왕이 극진히 맞이하니 시초이다. 신라는 고구려로 부터 지눌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에 들어와 군민 모례(毛禮)의 집에 굴실(窟室)을 만든 것이 효시이다. 527년(법흥왕 14년) 국교령으로 공인되어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이 당시의 왕권은 민중에 대한 지배의 필요성과 자기네 지위를 신성시 해주던 재래 신앙(자연신과 조상신 숭배)의 기능이 약화됨에 따라 새로운 지배이념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삼국시대의 왕실이 불교 수용의 주체가 되어 중앙 집권적 지배 체재를 정비하는 데 이용하게 된다.

한편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부도(浮屠)와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 불교를 고구려에 전한 것은 당시 중국 북방을 정복하고 남방의 동진(東秦)과 대치한 상황에서 후방인 동북방의 견제의 필요에서 고구려와 관계 개선을 위한 문화 교류의 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전진 불교는 새로운 귀족적인 불교였다.

따라서 초기 불교는 민간 경로를 통한 불교와 왕실을 통한 도안적 귀족 불교의 두 가지 형태로 발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 사회에 토착화되어 민간 사회나 지방 사회의 신앙적인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고 후자는 공식적인 불교가 왕실의 지원 아래 순도에 의해 포교되면서 중앙 왕실이나 지식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 나갔다.

남해에서의 불교 전래가 문헌상 명확한 근거는 없으나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에 인도에서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妣) 허왕후(許王后)가 가져왔다는 신라3층 석탑(新羅三層石塔)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세웠다는 전설과 대사가 이 산을 들어설 때 상서로운 서광이 비쳐서 보태산을 보광산(寶光山)으로 고치고 용문사(龍門寺)의 전신인 보광사(寶光寺)를 창건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조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점은 남해의 3대 사찰인 호구산 용문사(龍門寺)와 망운산의 화방사(花芳寺), 금산의 보리암(菩提庵)이 모두 원효대사(元曉大師)에 창건되었다는 점이다. 의상대사(義湘大師)도 거의 동시대 인물로 금산에 와서 기단을 조성하고 수행을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남해 사찰의 효시가 보광사로 추정되고 원효대사가 입적한 686년 (신문왕 6년) 이전이다.


1. 해관암(海關庵)


● 위치 동천 271 양화금 마을

● 창건일 1943년 2월

● 복원일(중창일) 1948년 4월 28일

● 도량구분 태고종(太古宗)

● 주불전명 대웅전 석가모니불

● 부속물 대웅전 콘크리트와조 정 3칸 측 2칸, 산신당, 용왕당, 요사체 콘크리트와조 정, 측 4칸

● 주지명 승룡(承龍) 지각스님을 은사로 1994년에 정수사에서 득도

●연락처 867-3337 011-551-4267

창건 유래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이용되다 사찰로 성격이 변하였다. 하전(河筌) 이상태(李相兌) 선생께서 1919년 8월 조직된 대한국민회에 가입하고 1920년 서울에서 계몽 노동단체인 조선노동총연맹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한흥회를 조직하고 적극적인 활동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4개월간 옥고를 치루다. 이곳은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해서 독립자금 모집과 활동을 위한 경남 유림담의 본거지였다. 해방 후 조계종 종정(宗正)을 지내신 설석우 큰스님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면서 사찰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설석우 스님은 서른일곱에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했다. 출가 전엔 '설약국'이라고 해서 유명한 약방을 운영하였고,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선비였고 정화 이전 모든 사판승들도 '절집의 재상은 설석우 스님'이라고 할 정도였다. 또 스님은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분이다. 금강산에서 6.25사변 직전에 지리산 칠불사에 오셔서 대중과 함께 기거하다가 당시 지리산 토벌 사건을 미리 예견하고 남해 해관암으로 오게 되었다. 나중에 해인사 조실로 계셨고, 정화 후에는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내셨다. 그 후 동화사에서 주석으로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고 입적하였다.

1994년 8월 6일 대웅전 장엄 단청불사를 하던 중 주지 스님이 선몽(仙夢)을 꾸고 창건 당시부터 존재했던 고 탱화를 조사 하던 중 복장(服裝) 유물로 진신사리 8과(顆)와 일체여래비밀(一切如來秘密) 전신사리(全身砂利) 보협다라니(保脇多羅尼) 1점과 당시 불사했던 스님명단이 발견되어 매년 친견법회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2. 미륵암(彌勒庵)


● 위치 물건리 63 방조림 측방 물건항과 인접

● 창건일 200여 년 전(추정)

● 복원일 1999년

● 도량구분 조계종(曹溪宗)

● 주불전명 극락보전(極樂寶殿)아미타불 콘크리트 슬라브조 정, 측면 3칸

● 부속물 삼성각(용왕신, 산신, 칠성신) 정,측면 1칸. 요사체 및 종무실 큰크리트 스레이트조정 3칸 측면1칸 탑, 석등 1기 미륵불1기, 해수관음 1기

● 주지명 청운(靑雲) 송광사에서 82년 출가

●연락처867-0776 주지 청운 011-870-0021


창건 유래


민간 신앙이 유지되어 오던 곳이라 추정된다. 원래 이 자리에는 미륵의 출현을 예고하는 돌무덤이 있었다. 동민들이 풍어와 안녕을 빌던 돌무덤이었다. 초창기 스님은 “이 돌무덤을 파헤치면 미륵 세분이 나올 것이니 봉행(奉行)을 하라” 라는 꿈을 꾸고 나서 돌무덤을 파헤치니 과연 인물 형상을 한 돌을 포함하여 3개가 발견되어 절에 모시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민간에 전승되어 오던 미륵 사상과 결부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창건에 실질적으로 많은 역할을 한 분은 유금순 씨로 알려져 있다. 조그마한 사찰이지만 미륵신앙을 믿는 인근 신도들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효험(效驗)을 믿고 몰려든다고 한다.

● 미륵신앙에 대한 개설

경전(經典)에 따르면, 미래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미륵불(彌勒佛)이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하생(下生)하여 인간세계에 태어난 뒤 출가하고 수행하여 성불(成佛)한 뒤에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하여 중생들을 교화(敎化)하여 이상사회(理想社會)로 이끌게 된다고 한다. 미륵신앙이란 미륵불이 이끄는 그러한 이상사회에 살 것을 기원하는 신앙이다. 경전에 설명된 미륵이상세계는 온 세상이 오직 평화로워 도둑의 근심이 없고, 도시나 시골이나 문을 잠글 필요가 없다. 또 늙고 병드는 데 대한 걱정이나 물, 불로 인한 재앙이 없으며 전쟁과 가난이 없고, 짐승이나 식물로 인한 독(毒)과 해(害)가 없느니라. 또 서로 자비스런 마음으로 공경하고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듯, 어미가 아들을 사랑하듯, 언어와 행동이 지극히 겸손하니, 이는 다 미륵 부처님이 자비하신 마음으로 깨우치고 이끌어주시는 까닭이니라. 살생하지 않는 계행(戒行)을 지켜, 고기를 먹지 않으니 저 세상 사람들의 감관은 조용하고 평온하다(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라고 한 바와 같이, 중생들에게 있어 모든 걱정이 없는 사회다. 그러므로 이 같은 미륵이상사회의 출현은 중생들에게 있어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공경효애(恭敬孝愛)가 잘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불교의 계율(戒律)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미륵이상사회의 출현은 중생들이 계율을 잘 지켜서 평화로운 세상이 전개될 때에 비로서 가능하게 되는데, 그것은 또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훌륭한 왕이 다스리는 사회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미륵이상사회는 중생들의 계율수지(戒律受持)와 국왕의 통치 모두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백제의 불교에서 계율이 성행하게 된 것이 미륵신앙의 발전과도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 관음선원(觀音禪院)


● 위치  고암리 소슬령, 삼천포 대방산 정상을 마주 보고 있다.

● 창건일 2003년 4월 10일

● 복원일

● 도량구분 조계종(曹溪宗) 관음도량(觀音道場)

● 주불전명 보광전(寶光殿) 목조와조 맛배지붕 정3칸 측 2칸

● 부속물 요사체 콘크리트 와조 정3칸 측2칸, 기타 목조 스레이트 2동, 해우소 콘크리트스라브조

● 주지명 일진(一眞) 1970년 송광사에서 서흥 스님의 상좌인 천장스님을 스승으로 출가

●연락처 867-3638, 5855 주지 011-852-5377


창건 유래


불사(佛事)를 계획 중이던 주지 스님의 꿈에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계곡에 상서로운 구름으로 가득 찬 곳을 지나가다가 신선이 나타나 지금 절터가 좋다는 암시를 하고 사라져 이상하게 여겼는데 꿈의 내용과 똑같은 지형을 발견하고 창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좋지 않은 곳으로 여기다가 실제 차로 시멘트 포장길을 올라보니 그 느낌 그대로였고 지주가 의외로 무척 호의적이고 적극적이라 이곳에 불사를 결정하고 터파기를 시작하자 순수한 노란 황토 흙이 많이 나오는 등 상서로운 일로 인해 그 자리를 주법당으로 삼았다고 한다. 사찰명은 화방사(花芳寺) 주지스님이 정하시고 남해출신으로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장(精覺院長)과 불교대학장인 법산(法山)스님이 증명법사로 개원 봉불식 법어(法語)를 하셨다. 풍수지리 전문가가 “이 자리는 고승의 기도처지만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형상이지만 목탁이 없다”고 하므로 목탁을 두드리지 않는 선원(禪院) 설립의 의미와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근거는 없지만 고사지(古寺址)로도 보인다. 우연히 지나치던 네팔의 부처님 진신사리(眞身砂利) 봉안 사찰인 샤인부탑 승려인 왕다라마의 방문으로 부처님 진신사리(眞身砂利)를 모시게 되었고 앞으로 많은 불자(佛子)들의 친견(親見) 예불을 위해 새로운 법당을 세울 계획이다. 왕다라마는 샤인부탑의 룩바린포체와 구추체추린포체 두 고승(高僧)을 모시던 분으로 우연한 인연으로 이곳을 방문, 정진했다.

보광전(寶光殿)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주불로 천수관음(千手觀音)과 백의관음(白衣觀音)을 협시(挾侍)로 하여 305소불(小佛)울 모시고 있고 또한 지인의 소개로 중국 목조(느티나무) 18나한(고래의 16나한과 포대화상과 달마대사 포함)도 함께 계신다. 벽화로 심우도(尋牛圖)와 달마도(達摩圖) 등이 있다. 

상서로운 기운과 징조들이 많지만 용맹정진(勇猛精進)하라는 불보살의 계시로 여기며 불은(佛恩)이 충만하고 있는 가람(伽藍)은 모든 것을 부처님의 가피로 고요함 속에서 독경 소리가 속세에 울려 퍼지고 있다.  .


4. 영지 법문사


● 위치  영지리

● 창건일

● 복원일

● 도량구분 지장도량

● 주불전명

● 부속물 

● 주지명

●연락처 


나. 개신교


기독교 개관

한국 개신교는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수용되었다. 우선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K.F.A.귀츨라프, A. 윌리엄슨, R.J. 토머스와 같은 선교사들이 개신교의 한국선교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들의 노력이 구체적인 결실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성서의 번역과 배포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873년 개신교의 한국선교에 뜻을 두고 만주에 왔던 J. 로스는 이응찬(李應贊)과 서상륜(徐相崙) 등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성서를 번역하게 되었다. 1882년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번역된 것을 시작으로 예수강셰일쳔 십칠년이 번역되었고, 1887에 최초의 한글 신약성서인 예수셩교젼셔가 발간되었다. 이들 성서 번역자를 권서인(勸書人)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의 활동과 한글 성서를 통한 한국인들의 개신교 수용으로 인하여 1884년 봄에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松川:지금의 소래)에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활동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위상을 정립해가고 있었다. 성서의 한글 번역에 공헌한 또 다른 사람은 개화파 지식인인 이수정(李樹廷)이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883년 입교한 후, 성서 번역을 시작하여 1885년 요코하마(橫浜)에서 (마가의 전복음셔언)을 출간하였다. 바로 이 마가의 복음서를 가지고 H.G. 언더우드는 H.G.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한국에 온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여 각기 활동을 시작하였다.

197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 개신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교단의 양적 팽창을 들 수 있다. 교인의 숫자가 크게 늘어갔으며, 교회의 규모도 대형화되었다. 수십만 명이 모이는 대형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교회성장의 척도도 외적인 차원에 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국 개신교의 양적인 성장의 이면에는 1960년 이후 산업화 과정 속에서 상실된 자아를 확인받으려는 대중들의 종교적 동기가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때때로 그릇된 축복관이 교회를 지배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의 축복이 마치 물질적인 풍요와 질병 치료로 대표되는 것처럼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대형화와 외면화 경향에 반하여 교회의 참모습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 개신교는 교회가 본래 담당해야 하는 교육·구제·전도·선교·사회봉사의 사명을 자각하고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이제 선교 1세기를 넘어선 한국 개신교는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의 한계를 뛰어넘고, 주체적인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고, 세계기독교사의 전면에서 자신의 자리를 매기고 있다.

 삼동면의 기독교 전래는 정확한 사료가 없어서 확정적이지 않고 다만 우리나라 해안지대가 초기 기독교의 전래가 빨랐던 점을 감안하면 육지의 타 지역보다 빨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 내산교회


●주소 봉화리 1789-4  

●설립연월일 1940년 5월

●역대교역자 최상림 목사 김갑숙전도사 김수목전도사 장정실전도인 임상숙전도인 김강전도사 임상숙전도인 김강전도사 박영기전도사 박정선전도인 박영기전도사  이종휘전도사 박요섭전도사 정재기전도사 최홍전도사 진용근전도사 서창수전도사 송학성전도사 최종수전도사 김장재전도사 이만수전도사 이민찬전도사 정규동목사 서보권목사 박일규목사 하진명목사1998년 7월9일-2003년 4월 10일  최송명 목사 2003년 4월 11일부임-현재  

●연혁 내산에서 처음 복음을 받은 분은 이복순 씨이고 박재일, 이백순 등 여러 분이 전도를 받아 1940년 5월 봉화리 1670 박재일 씨 집에서 첫 예배를 올리고 교회 설립 동기가 이루어지고 후에 경남도회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1943년 내산 서당 터에 처음으로 1,2차 교회를 세웠다가 1976년 4월 26일 영림서 자리에 현재 건물을 세우게 되었다.

●기타

●연락처 867-0779 목사 최송명 011-753-9919



2. 재건내산교회


●주소 봉화리 1735

●설립연월일

●역대교역자

●연혁

●기타

●연락처 867-4196


3. 동천장로교회


●주소 동천리 1012

●설립연월일 1961년 8월 5일

●역대교역자 정재기(1961-1963), 강득영(1963-1970) 강득송(1970-1971) 김봉춘(1971-1974), 최의종(1974-1976),김장재(1976-1979), 이길명(1979-1980), 장성동(1980-1981, 하해훈(1981-1986), 정종석(1986-1987), 김도영(1987-1989), 홍우표(1989-1991) 동성곤(1992-1994), 이성철(1994-1995), 박의길(1995-2003), 김경호(2003-2006), 서재근(2006.9 월- 현재)

장로장립: 1980년 11월 3일 최연철

          1998년 2월 1일 강장남

   

●연혁영혼 구혼과 사랑의 실천을 위한 기독교 사상의 복음 전도를 위하여 강득영 전도사, 박정준, 최연철 3인이 뜻을 모아 헌금으로  주위분들의 도움을 받아 설립.

●기타

●연락처 867-3616 목사 서재근011-256-2243


4.물건감리교회


●주소 물건리 453

●설립연월일

●역대교역자

●연혁

●기타

●연락처 867-1770 목사 최진하


5. 재건물건교회


●주소 물건리 101

●설립연월일 1992년 6월 29일(본관 준공일)

●역대교역자

●연혁 현재 전도사인 이동길 씨에 의하면 남아있는 기록이 전혀 없어 제대로 기록할

내용이 없고 도저히 찾기도 힘들다고 함.

●기타

●연락처 867-1939


6.삼동운화교회


●주소 금송리 1400-2

●설립연월일

●역대교역자

●연혁

●기타

●연락처 867-0365 전도사 김성찬 010-2763-5888


7. 삼빛교회


●주소 영지리 1629

●설립연월일

●역대교역자

●연혁

●기타 백은혜 목사가 개척 교회로 설립하여 운영하다 2003년 남해읍 입현리 1444번지로 옮겼다.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현재 교회일은 이곳에서 보고 있지 않다.

●연락처 867-7819, 백은혜 019-346-3579


8. 로뎀휴양원


●주소 동천리 1657

●설립연월일 2000년 8월

●역대교역자 이학재(2000년 8월-현재)

●연혁 목사 오랫동안 계획을 한 목사 이학재 씨의 사비와 교회의 성금으로 설립.

●기타  교회 관계자들의 기도처이고 무의탁 노인들의 생활 터전으로 이용하고 있다.

●연락처 867-8040  목사 이학재 019-603-8040


9. 영지교회


●주소 영지1167-3

●설립연원일

●역대교역자

●연혁

●연락처 867-2906 목사 오현준 011-562-0635


10. 재건지족교회


●주소 지족 200-3

●설립연월일 1935년

●역대교역자

●연혁 1935년 경남 남해군 삼동면 지족3리 정화연 집사 가정에서 예배드리다

1935년   ~          강경조 영수가 신앙지도를 하다.

1950년 2월  1940년 최희아 집사가 헌납한 회관에서 지족교회가 예배드리다.

         

1950년 3월 1일      남해군 삼동면 지족3리 211번지로 독립예배당으로 이사하다.

                     재건지족교회 교회명을 사용하기 시작하다.


1950년 3월 1일  ~   전몽룡 전도인 시무

1960년 10월 1일    

        

1960년 11월 ~       서이섭 집사께서 봉사

196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