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토지문학제와 하동

책향1 2007. 10. 13. 22:09

토지문학제와 하동

 <10월 13일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제7회 토지문학제 시작>

 

하동은 포구 생각이 마음에 각인되어 언제나 우리네 고향 같은 느낌이다. 과거 대진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 필자는 천안에서 처갓집이 있는 남해 가는 통과 의례였다. 천안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통해서 전주까지와서  수없이 많이 있는 고속단속 카메라가 있는 전주 남원간 4차선을 지나 구례까지 오면 남해에 다온 감이 들었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토지 문학제가 열리는 평사리 들판을 보며 섬진강변 도로로 남해에 오곤했다. 작년 토지문학제도 구경하였다. 남해 하동간에 시원스레 뚤린 4차선 도로가 웬지 모를 기대감으로 부풀게 했다. 하동 송림은 또 다른 하동의 자랑거리다. 사소한 것을 지역의 자원화하는 노력은 시민들에게 훌륭한 마음의 안식처를 제공했다.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식히며 문학의 정취에 빠져 보는 것도 하동의 자랑거리이다.평사리 입구의 허수아비 축제로 무슨 일인지 허수아비만 보면 좀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기가 힘들었다. 이 평사리 들판의 허수아비 축제를 벤처마킹하여  남해에서도 잠시 있었지만 수 많은 지역 축제에서 좀 남이 하지 않는 색다른 발상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남만 뒤 따라가서는 성공하기가 힘들다. 결국 남해 허수와 아비 축제도 깨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하동이라 하면 보통 녹차와 소설 토지, 재첩국, 청학동이 연상된다. 호두나무의 시식지는 천안 광덕산이지만  하동은 우리나라 차나무의 시식지로 알려져 있다. 녹차 축제는 5월에 열리고 토지 문학제는 가을철 10월에 열린다.하동차 그 역사는 신라에는 7세기 전반인 선덕여왕(632~647) 때부터 차가 있었고, 흥덕왕(826~836) 때에는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했다. 「삼국사기」 흥덕왕 3년(서기 828)조에는 “당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의 종자를 가져옴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6세기 전반에 편찬된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흥덕왕의 명에 의해 지리산에 차를 심었다는 사실이 진주목 토산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진주목 관할의 지역에 차 시배지가 있었을 것으로 인식한 때문으로 판단된다. 당시, 화개는 특수지역인 부곡으로 진주목에 속하는 구역이었다. 화개는 조영남의 노래로 널리 알려졌다. 지금은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무지개 형상의 다리로 연결되어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높히고 있고 매년 봄이면 쌍계사 가는 쪽에서 "왕의 차" 축제가 열린다.

 위 사진 하동 녹차밭 사진 하동군청 홈페이지 <하동녹차>에서 인용.

 

 위 사진 2007 토지문학제 안내 팜플렛

 

 위 사진. 팜플렛 내용."선생"을 빼면 없던 치통이라도 생길까. 다들 존경스러운 작가시지만 너무 어색하다."다녀 가시면서"도 역시. 기획자의 개인적인 지나친 존경심은 일반인을 오도하고 효과를 반감시킨다. 공식적인 안내문에서 다수 대중 일반인도 더 존경 대상이므로 이 청정 고을 하동의 햇살에게  미안하다. 혼자만이 보는 일기장이 아니고 내방객에게는 작가께서도 일종의 주인입장이기 때문이다.   

 

 위 사진 대작을 알기 쉽게 풀어적은 만화의 겉 표지. 만화지만 올 컬러로 무척 고급스럽다. 특히 대하소설을 읽기 힘든 저학년의 어린이들에게 세밀화와 같은 그림이 과거를 알리고 새로운 정서 함양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사진만화> 인용부분 삭제

 

작가의 열정이 느껴지는 한폭의 동양화이다.

작가의 사실적인 묘사가 그림에 안목이 없는 필자도 그림이 주는 강력한 이미지에 넋을 잃을 것만 같다. 추수광경으로 주인공 서희아씨의 어린 모습이 보인다. 그림만 보아도 작가의 열정이 후끈거린다.

 

소설 중의 격동의 1897년의 한가위 모습을 묘사한 부분을 인용하면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 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중략>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렇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 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 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 --- 요놈의 새 떼들아!"

 

극성스럽게 새를 쫓던 할망구는 와삭와삭 풀발이 선 출입옷으로 갈아 입고, 타작 마당에서 굿을 보고 있을 것이다. 추석은 마을의 남녀 노유,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강아지나 돼지나 소나 말이나 새들, 시궁창을 드나드는 쥐새끼까지 포식의 날인가 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한가위 모습이다.

 

 위사진. <필자사진>멋진 이정표 모습.

동네 어귀에 있는 이정표로 도움이 많이 됐다.

  

 

 

 위사진 <필자사진>토지 세트장 일부 모습.

 

어릴적 살던 우리집도 저랬지. 장마철에 방에서 마당을 내려다 보면 소 눈망울만한 물거품이 떠내려가던 모습을 추억하던 그집에 다 자라서 가보니 조그마한 오두막이었다. 필자의 고향집은 고속도로진입로 확장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관계로 그 정처없는 추억의 방황을 매어 둘 곳이 없는 아쉬움만 가득하다. 그 때는 장닭이 마루에 올라와 뭐를 싸 군복 조각 걸레로 닦아내면 마루장 틈새에는 닦기가 어려워 그냥 둬도 별로 문제가 없던 우리네 일상의 단편이었다. 

위의 여러 세트장안에서는 깃발의 내용 처럼 여러가지 체험 행사를 하고 있었다. 탈곡기로 벼타작하기와 도리깨로 콩타작하기 등 어린이 정서함양에 도움이 될만 한 좋은 모습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도리깨 시범을 보이는 젊은 아주머니 도리깨 잡는 방향이 달라 그만 머리에 쾅. 하하 그 아주머니도 어릴 적 농사일을 많이 해보지 않았던 증거다. 도리깨 돌아가는 쪽을 밖으로 잡으셔야지 안쪽으로 잡으신 잘못.

 형들과 같이 탈곡기 밟는거 안 거들어본 분 손들어 보시지. 잘 밟는다는 칭찬 한 마디에 힘차게 밟고 또 밟고 탈곡기는 그 때 잘도 돌았다. 

  

 

 

 위 사진<필자사진> 물레방앗간 모습. 

 

옛 물레방앗간은 지금의 커피숍일까.아니지 말그대로 방앗간이지만 현대적 의미의 의사 통로의  한 장으로 인터넷 카페라 말해야 제격이다. 소설 감자에서는 감자밭이었고 메밀꽃 필무렵은 숲속이었다. 혹  오뉴월 보리밭 내다보는 독자분은 아니 계실껴.

 

 

  위 사진 <필자사진>최참판댁 앞의 안내도.

 

뒤쪽 사람이 서 있는 곳에  입구가 있고 필자가 입장 당시 백일장 시상식을 하고 있었다. 훌륭한 안내문으로 내방객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안쪽에 들어 서니 우아한 한복 차림의 안내원 4명이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내방객을 안내하고 있었다. 진한 하동 녹차향 맛 같은 풋풋함에 발길을 가볍게 한다.

 

 위 사진<필자사진>  최참판댁 후방 사당 입구 모습.

 

실지로는 고저녁 했는데 사진은 현대적으로 보이는 점이 너무 유감이다.

이곳은 조상신을 모셨기 때문에 재산을 모두 잃은 서희아씨가 용정으로 가기 전 빌던 모습을 연상하면 참담하던 일제 강점기의 질곡이 눈에 떠오르고 그 참담한 심정은 누가 이해하리오.

 

 

위 사진<필자사진>은 최참판댁 서당 인근의 처마밑에 달아매둔 각양 각색의 옥수수 모습.

 

 키재기하는 모습같기도 하고 겨울철 고드름이 형상화한 것 같기도 했다. 예전 어릴 적에는 강냉이라 했건만 이젠 옥수수이지. 참고로 "옥수수"는 중국어 "슈슈"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위 사진<필자사진> 안채에서 하동 "왕의 차" 시연 모습.

 

사진을 찍으려면 꼭 이런 불청객 때문에 고민이다. 뭐 옆방의 "진희" 색시 본다나. "진희" 꼭 그 이미지와 잘 맞은 분이 잠시 후 한복 차림으로 튀어나오셨다.

 

 위 사진<필자사진> 토지문학관 입구 계단에서 본 최참판댁 모습.

 

한옥이 즐비한 것을 나타내려 했지만 솜씨 부족을 절감했다. 

 

 위 사진 <필자사진> 행사 마치고 내려오면서 군불 넣는 연기가 나는 모습의 평사리 들판.

 

이제 막 추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멀리 수탈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는 섬진강이 유장하게 흐르고.... 하동의 그 가슴 뛰는 열정과 정취는 영원하리라.  배부르면 금강산 아니 토지문학관 가는 중간에 있는 이 들판을 관망하면 자연의 신비로움과 풍성함을 그냥 경이롭게만 볼 수 없는 원초적인 욕망이 마음 저편에서 일렁인다.  하동이 뿜어내는 그 문학 향기만으로도 오늘도 배가 부르다.

 

 위 사진<필자사진> 식사장소인 시장터 모습

 

하동 너른 포구가 태평양을 향해 포효할 날도 머지않으리. "하동통보"사진이 없다. 너무 아쉽다. 하동통보는 행사장 엽전모양의 식권이다. 장터를 재현한 세트장이 식사 장소였지만 한꺼번에 몰린 내방객을 모두 배려하기에는 아마도 역부족인 성 싶었다. 기다리는 것 쯤이야 사람이 많으니 당연하지만 아는 분이 없으면 마냥 기다림에 인내력 발휘를 요구했다.필자만의 느낌일지 모르지만 앞으로의 개선점으로 지적하고 싶다. 뭐 간단히 배식소를 맞은편에 하나 정도 더 마련하면 될 것이외다. 아름다운 마음씨의 그 여성이 하동문인협회 명찰을 목에 걸고 계셨지만 성함을 잊으버렸다. 여성이라지만 꼭 이성적인 생각은 금물, 너무 고마워서. 자신의 임무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 밥배달까지 하시고 당체 죄송해서 드릴 말씀이 없다. 너무 꼼꼼하게 필자 일행을 도와 주신 점 이 글을 통해서 고맙다는 인사말씀 전한다. 언제 남해 오셔서 연락 주시면 따끈한 하동녹차 한 잔 올리겠다. 사진 속에도 그녀가 있다. 단아한 검은색 웃도리, 긴 스커트의 뒷모습. 

 

 위 사진<필자사진> 지나다 본 평사리 골목길 자투리에 널어둔 밤, 참깨 모습.

 

달밤에  참깨 다발 덮어 쓰고 귀신놀이 할까. 엄마한테 불려가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을 때 얼마나 아프던지 난 울었다. 50이 넘은 이 나이에 이런 것을 보면 난 바보처럼 그런 생각밖에 안난다. 그래도 다시 한번 어머니의 매를 맞고 싶다. 

 

감나무 밭이 군데 군데 있어 풍성함을 더하고 있다. 길을 걸으면  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축 처져 얼굴에 부디치는 감도 모두 대봉감이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리라. 평사리 벌판을 다 머금은 듯한

그 대봉감이 마을 풍요로움을 웅변하고, 축제를 열게 하니 그 보이지 않는 문화의 힘은 크고 장대하다. 소식적 떫은 감을 소금에 찍어먹고 점심으로 떼우고 흰 "난닝구" 물만 들였다. 속이 니글거리는 것도 참고 학교까지 뛰어 갔다. 아니면 가는 중간의 도랑물에 베어 먹던 감을  떫은 맛이 없어 지라고 돌로 눌러 담가뒀다가 하굣길에 다시 꺼내 먹었다.

 

평사리는 일반 민가와 축제 한마당, TV세트장, 감나무 등이 자연스럽게 어울어져 내방객들의 과거를 연상케 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전체가  세트장 처럼 조화를 이루어 들판을 내려다 보고 있다. 우리 나라 어느 축제에 가도 이렇게 잘 조화를 이룬 곳이 없다. 생활 쓰레기 등을 잘 정리하는 등 주변 미화에 신경을 쓰면 자연스럽게 지역민이 어울리는 축제의 장으로 손색이 없다. 다른 지역의 축제들이 지나친 장삿꾼들이 지역민의 호주머니를 털어간다는 비아냥은 평사리에서는 필요없는 말이다.

 

 

 시 한 편

 

하동포구

 

            남대우

 

하동포구 팔십리에 물새가 울고

하동포구 팔십리에 달이 뜹니다

섬호정 맷돌우에 시를 쓰는 사람은

어느 고향 떠나온 풍류랑인고

 

하동포구 팔십리의 굽도리 배야

하동포구 팔십리에 봄을 실어라

백사장 모래 우에 남아있는 글씨는

꽃바람에 쓸리는 충성 충자요

 

하동포구 팔십리의 물결이 고아

하동포구 팔십리의 인정이 곱소

쌍계사 종소리 들어보면 알꼐요

개나리도 정답게 피어줍니다

 

 위 글 하동군청 <관광안내> 팜플렛에서 인용. 

 

동행했던 분의 증언에 의하면 50년대 남해 지족에서 배로 하동읍까지 와서 장을 봐 갔다고 한다. 필자가 태어나기 전인 데 지금 하동 포구에 황포돛대가 휘날리면 누가 나무랄까? 쌍계사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면 섬진강 은어 자태를 자랑하고, 참게는 집게발을 치켜세운다. 봄이면 하동포구 80리길 벚꽃은 오므라들었던 마음을 행복한 나라로 이끄는 통로이다.

그 하동 포구 길상이 상념에 잠겼을 언덕이 어드메냐?

 해방되고 서희가 흰머리 희끗한 할머니가 되어 돌아온 하동 평사리 고향마을에서 옛일을 회상하며  한 마직막 명언이다.

 

 

" 이 땅에서 농사를 짓고 풍요롭게 살던 사람들...

 배고팠던 사람들.. 저 멀리 먼저 가버린 사람들...

모두들 다시 이땅으로 돌아올 것이야.. 땅이 있으니...

땅이 기다리고 있으니... 땅이 있으니..."

땅 속에 생명이 있는 한...

 

가을빛이 조용히 번저가는 이 무렵에 화합과 문화사랑으로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열정은 경전선 열차만큼이나 우렁차다. 수 많은 문화적인 가치 창출과 발굴은 지역적인 힘의 근원으로 하동은 영원히 찬란함 그 자체가 틀림이 없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물메기의 몸부림  (0) 2008.01.03
화방사음악제  (0) 2007.10.21
2007 대한민국 시인대회와 영월  (0) 2007.10.11
한국문협 제3차 신입회원 가결  (0) 2007.09.27
답신,아련한 추억지우기  (0) 2007.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