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고향 보물섬 남해
한국인에게 가장 좋은 냄새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밥 익는 냄새’라 할 것이고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뭔가라는 물음에 ‘가을 밤 여자 속곳 벗는 소리’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은 유명 수필가의 글 중에 나오는 말이다. 하나 덧붙인다면 가장 좋은 추억은 아마 고향생각일 것이다. 쪽빛 바다와 아름다운 산세를 고향으로 둔 우리 남해 사람들은 아마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 모른다. 어머니 품 같은 고향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낙원을 가장 많이 닮은 곳인지 모른다. 고향을 잊고 사람됨의 참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요즈음 상처로 얼룩진 아픈 마음 고치고 치료할 수 있는 많은 길 중에 고향 어머니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이다. 아픈 마음을 치료하는 길이 사랑이라면 하늘아래 고향 어머니만큼 뜨거운 사랑이 또 있을까 가끔 고향을 찾아 볼일이다. 성지 방문하는 기분으로 가 볼일이다. 고향은 내가 나서 자란 요람이고 추억의 보고이다.
고향 남해는 내가 나서 첫 꿈을 꾸던 천국이 아니던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고향의 추억에 대한 나의 열정, 그리고 정의에 대한 것을 회상해 본다. 그동안 아프고 쓰리던 그 사랑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그래서 그리운 남해이고 더욱 고향생각이 애절하게 난다.
말려놓은 깨단을 덮어쓰고 귀신 흉내를 내고 칡넝쿨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대싸리 나무의 어린순을 잘라 거기서 나오는 물로 벽에다 그림 그리고, 토끼풀로 손목시계 만들어 차던 여름이었다. 매미의 처절한 울부짖음을 지겹게 듣다 보면 어느새 계절은 가을이 되곤 했다. 쏙을 잡겠다고 어머니 몰래 된장을 퍼 나르다 조개껍질에 발을 베고, 갯벌에 엎어져 뻘 투성이가 돼도 흰 이빨 들어내며 웃던 천진함은 남해를 고향으로 둔 탓일 것이다.
고향의 가을은 바라만 보아도 풍성하고 바쁘기만 한 봄 보다는 그래도 한해의 수확을 거두는 기쁨 탓인지 가을은 조금은 여유로운 계절이 되곤 했다. 지난여름 시골길을 걷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이 인근에 목화꽃이 보였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보이던 목화밭이 이제 보기 힘들어졌지만 아카시아 흰 꽃잎이 져갈 무렵 다시 들판을 하얗게 수놓던 그 목화의 포근함에 취해 목화의 달콤한 어린 열매로 배를 채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곳에서 우연히 보게 된 목화의 이파리가 어찌나 반갑고 신기하던지 이제 보기 힘들게 되었다. 땅콩을 캐고 감자도 캐고 벼 베기를 할 무렵엔 손으로 휘젓기만 해도 펄펄 날아가는 벼메뚜기를 강아지풀 줄기에 목덜미를 꿰어 누가 더 많이 잡나 내기도 했었고 그 시절엔 흔했던 소주 댓병에도 꾸역꾸역 눌러 넣었던 기억은 혼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지천으로 피어나는 들국화는 향기도 향기려니와 각양각색의 색깔로 피어나는 고향의 들국화는 가녀린 외모보단 이슬을 살짝 머금은 청초한 아침에 보면 신비에 가까운 웃음으로 피어나곤 했다. 어느 누군가 새로운 이름으로 청초한 ‘보물섬 들국화’라 할 수 있다면 정감어린 말일게다.
고향의 들국화는 보라색이 그것도 아주 은은한 들국화로 한 아름 꺾어오고 길가에 뿌리내린 코스모스도 꺾어 한 아름 안고 오던 그때 그 어린 시절 코스모스의 짙은 자주 빛 꽃송이는 우리들의 코간지름 태우는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흰색, 분홍색, 짙은 자주 빛 그중에 짙은 자주 빛 코스모스 꽃송이를 뜯어서 비교적 엷은 색깔의 옷을 입은 내 여자 친구의 등에 있는 힘껏 때리면 내 여자 친구 등에는 한 송이의 또 다른 코스모스가 피곤했다. 좀 아팠겠지만 친구의 향기를 담은 코스모스 한 송이가 피어나던 내 고향 그 아련한 들녘 접시꽃이랑 무궁화 꽃 이파리는 또 하나의 동양화였다. 꽃잎 하나를 뜯어 이파리 중간을 조심스럽게 가르면 둘로 나뉘어 지는데 그 속엔 끈적끈적한 진이 들어있고 그것을 콧등에 붙이면 영락없는 장닭의 벼슬도 되곤 했다.
그 따스한 봄날 강아지풀을 중간으로 갈라 코밑에 콧수염으로 만들어 붙이고 다니던 내 동생은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 이파리를 옷에다가 붙여 군대의 계급을 지 맘대로 정해놓고 대장을 했다. 그 때는 그러면 대장인줄 알았다. 코스모스 씨앗 훑어오기는 학교의 숙제거리였고 편지봉투에 참한 꽃씨를 담아 가던 빛바랜 추억 하지만 기억이 생생하고 마을 인근 산이 밤나무 밭이었던 그곳은 방과 후에는 몰래 밤나무를 후려 갈겼으니 토실토실한 알밤을 까서먹으려면 여물지 않은 손바닥은 그야말로 수난의 시대였다.
여름엔 그곳에서 친한 친구를 만들고 어린것들이 인생을 논한다고 떠들어 댔으니 사람의 손으로 벼 베기를 하고 논에서 탈곡을 하고 마른 볏단으로 만든 집에서 나오는 까칠 까칠한 먼지 속에서도 아이들은 즐거웠고 역시 어른들의 얼굴은 행복이었고 미소였다. 도시의 월급쟁이들이 한 달에 한번 받아오는 급여가 그 만큼 기쁠까? 탈곡을 하고 난 논에서 남은 벼이삭을 줍고 감을 모두 따 내고 난 감나무를 쳐다보며 키 큰 나무 끝에 매달려 미처 따내지 못해 남긴 감을 긴장대로 낑낑거리며 때려서 급기야는 땅에 떨어뜨리고 다람쥐도 함께 뛰어 다니던 산에서 도토리도 자루 가득 주워 오고 그 것을 절구에 넣어 찧어서 껍질은 껍질대로 알맹이대로 걸러진 도토리로 어머니가 쑤어주던 거칠고 쌉쌀한 갈색의 도토리묵이 문득 먹고 싶기도 하다.
이런 지난 추억은 남해가 고향인 탓으로 더 진하게 남아있다. 해가 빨리 저무는 산골의 동네에서 해질 무렵 산등성이에 올라 바라보던 금산의 노을빛은 자연의 뜻 깊고 오묘함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일찍 밤이 찾아오고 일찍 아침 서리가 내리는 시골의 아침 까치밥으로 남겨두던 홍시 한 개를 바라보며 좋은 소식을 전해주려 울던 까치는 올해도 남은 자신의 밥 한 덩이를 찾아 먹었을까.
언젠가 가 본 낙산사 홍련암에서 해조음을 들으며 보리암을 느끼는 것은 고향을 속일 수 없다는 마음의 흔적이었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비단을 수 놓은듯 한 가을의 금산에 대한 아마 애착일 거다. 첫서리가 내리면 초가지붕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 먹던 기억에 아직도 눈이 시리기도 한 고향 보물섬이 그립다. 또 향수병이 도질려고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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