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유배문학관.南海島流し館

최근 계약직 임금협상 타개 소식을 듣고

책향1 2011. 4. 19. 16:57

최근 계약직 임금협상 타개 소식을 듣고


임금협상이 원만히 순조롭게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 필자의 노동운동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치부할 일이지만 필자의 일부 시를 읽으신 독자들께서 시 내용이 전반적으로 “우울하다”평가를 주셨다. 대신 “절묘한 은유는 좋았다”는 평도 함께 하셨다.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에 지적을 해주신 혜안에 정말 감사드린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나타난 개인적인 “방랑벽”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란 변명을 내놓았다. 유행가나, 드라마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은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작자의 경험이 잠재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필자는 “팔자에 없던 관공서 근무”에 대한 소회를 언젠가 그만 둘 때쯤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이게 이번의 임금협상 타결로 빨라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무 의욕을 잃을 만큼의 임금은 많은 문제가 있다. 흔히 “그 나이에 근무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여겨라”라는 말이 있다. 물론 그렇긴 하다. 그만 둘 시기에 그만두지 못하는 아픔도 늘 지니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임금은 배고픈 노동자들에게 아무리 올라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배고픈 근로자가 사용자 측 입장을 이해한다면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 격이다. 생활고에 찌든 사람이 급료 한 두 푼에 신경이 가는 만큼 더 중요한 것은 근무환경이다. 수목이 울창하고 쾌적한 사무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 내 분위기를 말한다.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오는 “왕따”니 “몸 조심하라”는 말에 어떤 분에게는 “말 조심하라”는 말까지 나온다. 당연히 초등학교도 아니고 60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은 모욕에 가깝다. 비난하는 사람들은 효과적인 말인지 몰라도 지역에서 문화발전과 위상 제고에 힘써도 시간이 모자랄 판국에 부창부수로 부르짖고 다닌다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경우이다. 이런 말에도 자신이 하지 못한 말을 했다며 통쾌해 하며 화장실 가서 웃는 사람들이다. 

상사 부인의 전화 한 통화에 근무 중인 직원이 출판 기념회에 가는 일이나 우편 발송봉투나 주소록 만드는 일은 개인 사무실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직장 내에서 분위기를 여러 차례 해치는 사람이 있어도 개인 인기 관리 차원에서 방관하고 있다. 소를 위해 대가 희생되는 경우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근무태도가 불량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험 잡을 때 전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숙고하지 않은 관리자들이 늘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다.

진정한 리더십은 큰 회사나 관공서나 인간미에서 나온다. 거기에는 속 깊은 배려가 필수이나 자신들 살기에 바빠 계약직들이 소외되고 있다. 무슨 일이 급선무인지 파악도 않은 채 지속적으로 양비론에 매달린다. 이 양비론은 어쩜 가장 비겁한 자의 도피구이다. 더군다나 관리직에 있는 사람은 분명한 태도가 있어야 하나 늘 좋은 사람 소리만 듣고 싶은 게 문제다. 이미 좋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듯 한 삶들이라면 더 할 말이 없다. 자신도 위아래 가리지 않고 멱살잡고 남의 뺨을 자주 때리는 사람은 자신도 맞아 보면 기분이 다를 것이다.

끼리끼리 모여 사람을 재단하고 떠도는 말에 객관성을 덧붙이고 인신공격이나 하는 현상은 못난 체제 하에서나 있는 일이다. 여론의 편식이 얼마나 나쁜지와 실질적으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평가를 모르고 있다. 사실적인 일과 유리된 인의 장벽이 무섭다는 것은 여론의 편식 때문이다. 결국은 인생 경험 부족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두려움이 세상이 좀 더 나아지는 것을 더디게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게 한다.

 불리하면 높은 사람이나 들먹이고 자신의 사업에 지장이 있는 사람은 다른 부서로 보내는 일이 자주 일어나면 결국 비판은 누가 받는지 자명하다. 이런 일이 다반사로 벌어져도 말리는 사람도 없이 곶감만 빼먹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