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개인적인 경험이 뭐 대수는 아니지만 선경험담이 때로는 좋은 충고가 될 수도
있죠. 20여년이 흘러간 과거의 일입니다. 그때와 지금 이성을 사귀는 것은 좀 다른 모습이었죠. 특히 뚱뚱하고 키가 작고 소심하고 열등감을 갖고 있던 저에게는 영영 이성을 사귈 기회조차 없을 줄 알던 때였죠. 어릴 때부터 문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어설프지만 많은 글귀를 짓고 혼자 평하고 했습니다.
중학교 다닐 무렵 서서히 이성에 눈뜰 때였지요. 동생도 없고 나이 많은 부모님 밑에서 비교적 외롭게 자란 저는 옆 동네 다른 여중학교 동급생을 좋아 했죠. 용기 없고 소심하고 뚱뚱했던 저는 말하자면 여학생들에게는 인기가 참 없었죠. 그때부터 시작하여 군 제대 때까지 일방적인 저의 본심인 첫사랑을 모르더군요. 결국, 저도 인간인 이상 불필요한 이상한 오기가 점차 생기고 제대할 때 편지로 '마음의 첫사랑'이었음을 계획적으로 알려줬죠. 그래도 모르는 체 하더군요. 결국 포기하였죠.
가끔 명절에 고향에 가면 옆 동네 친구들에게서 그녀에 대한 풍문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미혼이랍니다. 어릴 때는 신체발육 후를 몰랐지만 참 제가 사귄 여자 친구 중에 가장 형편없는 모습 즉, 키도 너무 작고 참 못생겼습니다.
당연히 저 때문에 미혼인 상태는 아닐 테고 그 못생긴 외형이 결혼을 못한 주원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떳떳하죠. 그 소심했던 열등감도 벗어났고 '첫사랑은 그렇고
그렇다'란 말로 자위하곤 하죠. 예쁜 집사람과 아이들.... 그 첫사랑(?) 여인은 손목 한번 잡지 못하고 용기 없이 근처에서만 떠돌던 저를 (추측이지만) 도리어 잊기 힘들겠죠.
차라리 이루어지지 않을 바에야 상대의 마음에 남는 사람이 되는 것도 남는 장사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평소 써오던 글을 남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하는 호기심으로 불안한 마음을 삭히며 잡지사에 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글 중에 시를 몇 편 잡지사나 주간 신문 등의 독자난에 보냈죠. 아 그런데 그런 글이 거의 대부분 채택이 되어 처음으로 희열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작품 밑에 글쓴이의 이름과 주소가 들어갔으므로 수많은 편지가 집으로 왔습니다. 그중에는 글에 대한 평가와 함께 정중한 충고인 편지도 많았지만 대부분이 여성들 편지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의 소심한 열등감 때문에 여성취향의 글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불치병에 걸린 환자인 줄 아는 사람의 글도 있었죠. 글이 실릴 때마다 라면 박스 한 개 분량의 편지들이 쇄도를 하였고 그중 가장 글씨가 예쁜 여성에게 처음으로 답신을 보내고 6년간의 긴 인연이 시작되었죠.
외롭고 척박했던 경상도 시골 농촌 출신의 저보다는 그녀는 훨씬 세련된 모습의 서울 처녀였던 셈이죠.
군을 제대한 후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요행스럽게 합격하여 서울로 진학을 해서 그림 속의 미인 같던 그녀를 자주 만나게 되고 졸업하던 해에 결혼을 하려 둘이서 흑석동 강변의 좋은 예식장도 예약할 정도였습니다만 일은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했었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보이던 그때 양가 부모님들이 만났죠. 그런데 저의 어머니와 형님을 만나던 그녀 부모와 친척들의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한 표정 속에 언뜻 보이는 불편해 하던 모습은 결국 파혼으로 가게 되었답니다. 농사일을 하던 저의 어머니와 형님들의 허연 머리, 시커먼 얼굴과 굵은 손마디, 초라한 차림새에 서울에서만 살던 그분들에게는 충격 바로 그 자체였 던가 봅니다. 그 후 그녀와 전 그녀 부모님과 친인척들 설득을 위해 진력을 다했지만 한번 충격은 그리 쉽게 지워지지가 않더군요. 결국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그녀 아버지로부터 파혼을 선언 받았죠. 일반적으로 결혼 문제에 어머니들이 부정적인 경우가 많으나 저의 경우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일방적 거절이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힘을 다해 설득하고 또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고 저 또한 여러 가지로 자존심이 망가진 상태였죠. 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저의 어머니나 시골 형편을 보고 그런다는 것이 더 가슴이 아프더군요.
제가 첫사랑이던 그녀의 충격이 엄청 났고, 저 역시 사실상 처음인 그녀와의 사이에서 많은 심적인 타격이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고 각각 헤어져 다른 길로 가게 되었죠.
전 그 후 학창시절부터 관심이 있던 불교사상에 심취하였고 직장 일에 몰두하며 그 아픈 사연을 잊을려고 노력을 했죠.
그런데, 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기자로서의 꿈을 이루고 정치 담당을 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국회의원이던 그녀 아버지를 취재하며 재회를 하였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고 그냥 저나 그분도 사무적인 모습이었죠. 그러던 중 결국은 은행장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이고 잘 나가던 그녀의 아버지도 YS정권하에서 정치 자금 문제로 타의로 정계 은퇴를 하였죠.
저 또한 그 후 중앙 언론에서 퇴직하고 지금은 이름 없는 지방신문에서 편집을 하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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