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 러시아의 대표적 유배객 소개
흔히 형벌로써 유배가 없는 줄 알았던 유럽에도 유배객은 있었다. 제정러시아에서 대표적인 유배 인물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트로츠키다.
1849년 12월 영하 50도의 강추위에 사형을 선고받은 28세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1821~ 1881)는 형장에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진 페트라솁스키가 주도한 독서모임에서 활동하다 반체제 혐의로 검거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당시 니콜라이 1세는 서유럽 자유주의 사조의 유입을 두려워한 나머지 젊은 지식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자 일종의 연극을 꾸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사람의 사형수와 함께 두 눈이 가려진 채 사형대에 묶였다. 사형수들에게는 최후의 5분이 주어졌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정은 훗날 그가 펴낸 장편 소설『백치』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 “이 세상에서 숨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뿐이다. 그 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2분은 삶을 되돌아보는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데 쓰고 싶다”고 술회했다.
5분의 눈 깜짝할 사이 기적이 일어났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멀리서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달려왔다. 사형 직전 풀려난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됐다.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유배생활 체험은 나중에 장편소설 『죽음의 집 기록』에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그가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것은 형을 마치고 군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한 뒤인 1859년이다. 극적으로 사형을 면한 그는 여생을 소설 쓰기에 쏟았다. 1864년은 아내와 형의 죽음, 잡지 경영 실패 등이 겹친 불운한 해였다. 그 결과 막대한 빚에 쫓긴 채 해외로 도피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쫓기는 삶을 살게 된 데는 노름빚의 영향도 컸다. 그는 도박 중독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 『백치』 『악령』 등 3대 장편을 발표했다. 1878년부터 1880년까지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집필했다. 이 작품들은 고난 속에서 피어난 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인 트로츠키(1879~1940)가 카자흐스탄의 알마타에서 유배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알마타에서 열린 제7회 동계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아시안 게임이 열린 도시가 과거에는 유형지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버지 다비드 브론슈타인은 러시아의 유대인 출신 농부로 대초원 지역의 식민지 이주자였고, 어머니 안나는 교육받은 중산계급 출신이었다. 형과 누나가 1명씩 있었고 2명의 형제는 어릴 때 죽었다. 8세 때 오데사에 있는 학교에 들어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외사촌 가족과 함께 8년을 보냈다. 1896년 니콜라예프로 옮겨 학업을 마쳤으며, 이곳에서 지하 사회주의 모임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를 접했다.
1898년 1월 혁명에서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4년 반 동안 투옥된 뒤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1902년 트로츠키라는 이름으로 위조된 여권을 가지고 도망쳤는데, 그는 이 이름을 혁명가로서 자신의 가명으로 채택했다. 부인은 남았으며 트로츠키는 런던으로 가 혁명적 신문 〈이스크라 Iskra〉를 발행하는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레닌)와 함께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합류했다. 1903년 7월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민주적 방식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멘셰비키 편에 서서 레닌과 볼셰비키에 반대했다. 1905년 혁명적 소요가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소비에트가 혁명적인 파업운동과 차르 정부에 대항하는 여러 반란을 조직했을 때 그는 소비에트의 지도적인 대변인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1906년 다시 투옥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투옥기간에 주요저서의 하나인 『결과와 전망 Results and Prospects』을 쓰면서 영구혁명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1907년 다시 시베리아로 유배된 그는 빈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정적인 레닌 역시 1897년 재판에서 유배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와 슈센스케에서 5년을 보냈다. 두 정적이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시베리아는 제정러시아 이후로 유형지로 이름이 났다. 시베리아는 러시아 동부인 아시아 대륙북부의 서쪽 우랄산맥에서 동쪽의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이른다. 르마노프 왕조의 표트로 1세의 모피 등을 얻기 위한 동진 정책으로 개척에 필요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사형제 대신 유배형을 1653년 칙령으로 발표했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사기』를, 시베리아 유형을 당한 도스토예프스키가『죄와 벌』, 18년 귀양살이의 다산이 『목민심서』, 9년 제주도 귀양의 추사는『세한도』, 서포의『구운몽』을 낳았다. 역사는 위대한 피압박 희생자를 기린다. 가해자들은 추악한 흔적만 남을 뿐이다. 몸만 가두었지 사상까지 가두진 못했다. 우리가 역사를 두려워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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