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는 원당을 지나고 자모리 등에서 현풍으로 수리천을 건너가던 거룻배를 잠시 빌여 탄 모습이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있고 길은 포장되어 이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사진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 도동서원 앞의 은행고목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다.필자는 예의 검정 교복에 단추는 요란하다. 3년전 이 사원에 가니 울창하던 은행나무는 왜소해졌고 살아있었지만 말없이 지나온 과거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옆으로 유별나게 삐져 나온 가지에 올라가 찍은 선명한 사진이 있는데 시간이 나면 올려 봐야 겠다. 이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소풍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혼자 가을 추수로 나락을 논바닥에 쌓아 둔 그 으스스한 길 즉, 소리서 신마산까지 그 먼길을 혼자 비포장 도로를 터벅터벅 걸어왔기 때문이다. 달빛 어스름에 간혹 무섭기도 했다. 멀리 가는 소풍이 좋은 소풍일 때 구지로 돌아 먼길을 돌아 오고 이 해의 색다른 가을의 느낌은 이제 없을 것이다.
도동서원의 수문장 구실을 하고 있는 이 나무는 도동서원으로 사액된 선조 40년(1607) 에 당시 안동부사로 재직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외증손이 며 퇴계선생의 고제인 한강 정구선생이 도동서원 사액 기념으로 식수한 것 이라 전하며 수령이 약 400년이다. 도동서원 앞 경내에 유유히 흐르는 노거수로서 퍼진 가지의 길이가 동쪽 30m, 서쪽 2가지 25m, 남쪽 28m, 중앙 22m 이다. 북쪽으로 난 가지가 10여년 전에 부러졌는데 가지가 부러지기 전 약 3∼4일간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도동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이 기회에 김굉필 선생에 대한 소개를 하자면
본관은 서흥(瑞興). 어렸을 때의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의 딸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한 집안이다. 경기도의 성남(城南)·미원(迷原)과 야로(冶爐:처가)·가천(伽川:처외가)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손(金馹孫)·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 등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누가 혹 시사(時事)를 물으면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답할 정도로 〈소학〉에 심취했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때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一身)의 청정적멸(淸淨寂滅)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斥佛)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다. 1486년 당시 이조참판으로 있던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올려 그가 국사에 대해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사제지간에 사이가 벌어졌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하여 남부참봉이 된 뒤, 전생서참봉·군자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소학〉을 배운 것은 이때의 일이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順川)으로 옮겨졌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 등의 상소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노불(老佛)을 사도(邪道)라 하여 배격하고 유학의 도통(道統)에 참여할 때 참다운 진리를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수기(修己)의 대요(大要)는 언행을 삼가는 것[謹言行]과 위의를 바르게 하는 것[正威儀]에 있으며, 수기의 근본이 정심(正心)·성의에 있으니만큼 수기를 위한 궁행(躬行)의 요체는 경외를 숭상하는 것[崇敬畏]과 일욕을 경계하는 것[戒逸慾]에 있다고 파악했다. "천하의 만물은 이(理)가 있고 분(分)이 있으니, 이(理)는 만가지 것이 모여 하나가 된 것이고 분(分)은 가지로 나뉘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하여 보편과 특수의 일체성을 강조했다. 한편 "작은 털에도 태극이 갖추어져 있으며 태산이 크다고 하지만 그 역시 하늘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形而上)으로 보면 천지도 또한 일물(一物)이 되고 형이하(形而下)로 보면 사물마다 무극(無極)이 된다"고 이일분수설을 설명했다.
그의 학문은 조광조·김안국(金安國) 등에 전해져 뒷날 지치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기호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김안국·이장길(李長吉)·윤신(尹信)·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 등이 있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이황은 그를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으로 칭송했다. 아산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 화곡서원(花谷書院)·희천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 景賢錄〉·〈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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