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세상읽기

지역언론과 권력

책향1 2007. 10. 30. 13:34
 

지역언론과 권력


언론이 올바른 여론 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언론의 자유'는 실로 중요하다. 인간을 존중한다는 것이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고 인간의 개성은 그의 사상에 있다. 인간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상은 원래 남에게 발표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는 사상을 밖으로 포현하는 자유 즉 '언론의 자유'를 근본으로 한다. 세계 어느 나라이건 권력자들은 언론과 숙명적인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독재국가가 아닌 한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서로 불편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언론의 본질적 존재 가치가 권력에 대한 감시 내지 비판기능에 있기 때문이다. 항상 권력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 조성을 위해 끊임없이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이런 점을 이용해서 지역에 안주하려는 신문은 우선 권력에 순치된 신문으로 등장한다.

성군 세종은 비교적 자유로운 시정의 여론 즉 언론에 관대했다. 반면 숙종은 1687년 경연에서 “조사석이 우의정이 된 것은 장희분 덕분이라는 것이 시중의 여론"이라 전했다가 분노한 숙종이 "말의 출처를 대라"는 엄명에 거역하다가 의금부에서 대명하고 처벌 전지를 쓰라는 왕명에 사관들이 "이 붓은 역사를 쓰는 붓"이라며 김만중의 처벌을 반대하고 비서실 격의 승정원 역시 거부했다. 여러 가지 국문에도 김만중은 끝내 함구하여 평안도 선천으로 귀양갔다. 이처럼 예로부터 권력과 언론은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언론의 비판을 용인한 정권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비판세력에 대한 관대한 덕치이기 때문이다. 반면 ‘바른말을 하면 피 본다’는 속된 말도 맞기도 하다.

이런 역사 속의 사례를 보지 않더라도 지역의 언론을 대입해 보면 우리 지역의 언론들이 과연 제 역할을 다 하는지 의아하다. 당연히 중앙의 메이저 언론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밖에 없다. 첫째 그 원인은 경제력이다. 신문의 기능은 비판기능이 우선이다. 비판 기능과 경제성 중 어느 것이 우선인가를 두고 보면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의문처럼 섣불리 답하기가 어렵다. 경제성 즉 지역신문의 열악한 자본력으로 비판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중앙지의 경우 수많은 독자들의 성원으로 먹고 살 수는 있다. 지역의 경우 비판 기능에 충실하다보면 지자체로 부터 광고가 끊기는 일이 생기고 이는 곧 경영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1974년 12월경의 동아일보 광고 사태의 경우 당시의 유한한 정권은 가고 동아일보는 살아남았다. 이는 경제력이 뒷받침되고 수많은 독자들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남해신문의 군청광고 중단 당시 열악한 지역신문의 경제력 탓으로 결정타를 맞았다. 신문의 수입이 떨어지고 후에 경영진이 바뀌었다. 그 전후로 당시 지역의 양대 신문 편집국장들의 중도 하차가 있었다. 편집국장들의 퇴진이 신문사내의 단순한 문제로 국한하거나 개인 사정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면이 많이 있다. 결국 바른 말을 하다가 ‘피를 본’경우로 여기기보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언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 권력들의 무소불위의 횡포로 보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에도 지역에서 누구 하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언론인을 비롯하여 지역의 많은 양심들도 입을 닫았다. 편집국장은 일반인이 아니고 군민들로부터 알권리를 매개하는 중개자로 공인이었지만 모든 사태가 당사자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 말았다. 언론의 자유를 편집국장의 입으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편집권 자유를 훼방하는 외부 세력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하며 그 지위가 우선적으로 안정을 이루어야 한다. 반대의 경우 결국  순치된 신문으로 나타나고 읽을거리 없는 신문으로 전락하고 만다. 공직자는 권력 잠시 빌렸을 뿐이므로 언론의 주목을 감내해야 할 권력들의 횡포에 맞서기보다 좋은 것이 좋다는 편안한 생각과 동료애가 없던 언론인들의 자승자박의 결과이다. 

경영상의 문제만 골똘히 생각하는 지역언론사 경영진들 성향이 신문의 색채로 나타나고 따라서 대중으로부터 눈치보다는 자리보전을 위한 경영진이나 권력의 눈치를 보는 한 신문 고유의 기능인 비판 기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항상 경영상의 문제를 안고 있는 열악한 신문에 날카로운 비판 기능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언론인의 자부심을 개인적으로 나타낼 것이 아니라 기사로써 기자다운 예리한 면을 갖춰야 한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영향력을 줄이려면 우선 품위 있는 기사와 건전한 비판 능력으로 많은 독자들의 호응이 우선이다. 언제까지 비판기능이 훼손된 체로 방치 하고 있을지 지역의 언론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정당한 비판 기능을 회복하여 독자들의 칭송을 받을 때 권력은 언론을 두려워 할 것이다. 과연 바른 말로 피를 볼지, 충과 효로 후세에 널리 칭송되는 서포가 되든지 선택은 언론인 자신들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