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인들의 '백의 종군한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다.보직을 포기하고 사심없이 일을 하겠다는 말인 것 같은데 필자와 같은 서민들은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익숙해져 이 말도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느낌이다. 저급 정치인들의 자기미화에 너무 자주 애용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 임진왜란이라면 독자들은 무슨 생각이 먼저 떠 오를까? 우리 국민들이 도륙된 잔인한 일본의 침략 전쟁이다.
울산 왜성의 일본측 기록화에 보면 조명 연합군에 포위된 왜군들이 물 대신 말의 목을 처 그 피를 마시고 몰래 물을 구하러 왜성을 빠져 나온 그림을 그린 사람의 기록에 온 천지가 피빛이라 했다. 서생포왜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임란이 발생한지 3개월만인 1592년 7월부터 쌓기 시작해 다음해 완성했다.
서생포왜성의 지성(딸린 성)인 울산왜성은 1597년 1월 일본이 정유재란(1597년1월~1598년11월)을 일으킨 뒤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 해 10월 후퇴하면서 쌓았다. 울산왜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1만6000여명을 동원해 40여일만에 쌓았는데, 그 돌은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 충당했다.
위사진 울산 왜성 전투도.
정유재란 발발 이듬해인 1598년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에 비밀리에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일본군의 철수를 엄호했던 부대가 바로 서생포와 울산왜성의 가토 기요마사 부대였다. 일본군은 이 울산왜성을 마지노선으로 삼고 물러설 수 없는 저항선을 구축했다.
울산왜성에서는 2차례에 걸쳐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다. 첫번째 전투는 1597년 12월23일부터 1598년 1월4일까지 13일 동안 치러졌다. 울산왜성 축조공사가 막 마무리된 즈음인 12월23일, 조명연합군 5만명은 성안의 1만여 왜군을 고립시키면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일본군을 따라 온 종군 승려 경념은 그의 일기에서 "물도 식량도 떨어져 성안에 고립된 일본군은 오줌을 받아 마시거나 말을 잡아먹었다. 심지어는 벽의 흙까지 긁어서 끓여먹었다. 성 안에는 우물이 없었다."고 처절했던 상황을 표현했다.
그러나 공격과 방어가 되풀이되는 가운데 극심한 추위가 찾아오고, 일본의 구원병이 삼산벌을 가득 메우자 퇴로가 막힐 것을 우려한 조명연합군은 결국 경주방면으로 철수했다. 13일간의 처절한 전투에서 양측은 1만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두번째 전투는 그 해 9월에 발발했다. 이 때도 조명연합군은 수만명을 이끌고 도산성 함락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은 1차 전투를 거울삼아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수성에만 주력했다. 결국 연합군은 또 다시 경주로 회군했고, 전군의 철수명령을 받은 일본군은 마침내 11월18일 울산왜성을 불태우고 퇴각했다.
이런 뼈아픈 역사를 가진 울산왜성은 지금 '학성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그림은 도산성 전투에 참가했던 일본 사라번 번주(藩主) 나베시마가 가신(家臣) 오키(大木)에게 생지옥 같았던 당시 상황을 구술해 그리게 한 것이다. 메이지(明治)시대 때 이 그림을 모사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사카모토가 소장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선조 25년(1592)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순국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도망가는 자와 순국하는 모습이 무얼 말하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현재 부산의 일본 영사관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송상현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언젠가 처음 본 동래부사송상현의 순절도를 보고 웬지 모를 격한 울분이 가슴을 뚫고 올라왔다. 당시 부산에 침입한 왜군의 선봉장을 맡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싸울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며 송상현 장군에 협상안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송 장군은 지금까지 널리 회자되는 명언 즉,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는 것은 어렵다`는 말로 결사항전의 뜻을 밝혔다.
아래의 사진에는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다른 순절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한 쪽에서는 성이 무너지고 조총을 든 왜군들이 진입하고 빨간 치마를 입은 부녀자들이 성내 동헌 지붕에 올라가 치마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도 보인다. 이런 치욕적인 모습을 그림으로만 봐도 알지 못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오는데 그 당시 절박한 심정은 말로 다 표현 못하리라. 이 그림을 역사책에 올리면 어떨까? 역설적으로 패배의 역사를 강조하여 도리어 애국심을 자극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일본 고교 역사책에는 만주봉천에 입성하는 일본군이란 사진이 있다. 말을 타고 욱일승천기를 나부끼는 모습으로 자부심을 강조하고 있다. 승전의 역사가 별로 없는 우리나라의 역사 교과서도 치밀하게 감성어린 학생들을 조용히 자극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임란과 정유재란을 일본역사에서는 분로쿠노 에키(文禄·慶長の役)로 가볍게 기술하고 있다. 이는 지방의 변란 정도란 말이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 처음 그려진 것을 영조 36년(1760) 화가 변박(卞璞)이 보고 다시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치열했던 교전의 장면을 화폭에 나타내었다.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 병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왜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의 순절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북문 밖으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변사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면 위쪽의 산은 윤곽선을 선으로 나타내고 점을 찍어 표현하였는데 절박한 당시 상황을 표기 하느라 다소 경직된 모습이다.
작품의 격은 그리 높지 못하고 구도나 형태, 필치 등에서 경직된 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커다란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민족성을 표현하여 민족적 교훈을 담고 있다.
임란 결과 승리자는 어느쪽일까? 패배의식 때문일지 모르지만 패자는 분명 조선이다. 조선개국(1392년) 이래 평화 시대를 달려온 조선이 문약했고,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전투에 능수능란한 군대를 보유 했다. 더우기 일본은 가고시마에 전해진 포르투칼의 조총기술로 당시 세계 최고의 개인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조총은 나는 새도 떨어떠린다는 의미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조총 애호가들의 모임에서 조총 사격 시범을 하는데 그 위력이 철판을 뚫을 정도이다. 우리도 귀순한 김충선 장군의 건의와 기술로 조총을 만들었으나 무슨 일인지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해전에서는 충무공의 노력으로 승리 했지만 육전에서는 연전연패를 면치 못하였고 함경도에서는 조선인의 안내로 순화공 등 왕자 2명이 왜군에 사로잡히는 등 수모를 당했다. 관군보다 민병인 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조선의 조총 활용은 미미했지만 대신 해전 등에서의 대포의 활용은 대단해 왜군들은 도망갔다. 백성을 내버리고 임금이 도망갔지만 일반 민중이 일어나 싸우고 우리 끼리 내부의 분열로 왜적에게 도움을 준 전쟁이었다. 수 많은 침탈의 전쟁에 우리 끼리의 적은 항상 외적에게 도움을 주었다. 지금은 우리끼리의 싸움은 우리의 지리멸렬로 통한 역사적인 사실들이 지금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으로 현재도 등장하고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강성 대국이 되지 못하는 한 이나라의 운명은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 결국 우리 자신에게 있다.
위 사진 충무공 호송장면 재현 모습.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러일 전쟁의 일본 영웅 도고는 이순신 장군에 비해 자신은 하사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러일 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기폭제 역할을 한 대한해협 해전은 그가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전법을 모방한 것이란 논리에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못한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순신이 투옥된 뒤 그 사이에 서인들은 그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선조를 졸랐고, 반면 그를 죽이면 안 된다고 탄원하는 사람도 많았다.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은 탄원서를 통해 고문을 더 하지 말고 그의 목숨을 살려 다시 전공(戰功)을 세울 기회를 주도록 호소했다. 또 이에 앞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도 글을 올려 '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수군이며 이순신을 바꿔서는 안 되며, 원균을 보내서도 안 된다' 라고 상소했다. 또한 이덕형(李德馨)도 구명을 호소했고 이순신의 심복인 정경달(丁景達)은 '이순신 장군을 죽이면 나라가 망한다' 는 애타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런 저런 곡절 끝에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이순신은 투옥된 지 28일 만인 4월 1일에 풀려났다. 그러나 무죄로 방면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의금부 옥에서 풀려난 뒤 썼던 그 날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자.
''맑음. 옥문을 나오게 되어 남대문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으로 갔다. 봉(蓬), 분(芬), 울(蔚)과 사행(士行), 원경(遠卿)과 한방에 같이 앉아서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했다.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찾아왔다.
슬픔이 더해짐을 이길 수 없었다. 윤 지사가 돌아갔다가 식사 후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기헌(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양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마셨더니 몹시 취했다. 이(李) 영공(永公) 순신(純信)이 술병을 차고 또 왔으므로 함께 취해 이야기했다.
영의정(領議政; 柳成龍)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禧壽),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 최원(崔遠), 동지 곽영(郭嶸) 등이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술에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백의의 몸, 즉 무등병으로 강등당해 권율이 있는 원수부(元帥府)가 있는 합천군 초계로 향한 것이었다. 그날은 수원에서 묵고, 4일에 평택을 지나 5일에는 아산에 이르렀다. 선영에 참배하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13일에 순천에 피난 갔던 83세의 노모 변씨가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산 본가로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운명하셨다는 비보가 왔다.
참으로 무심한 하늘이었다. 비통한 심정으로 시신을 집으로 모셨으나 금부도사의 재촉에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합천으로 떠났다.
그때의 사정을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11일, 새벽에 꿈이 너무 번거로워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덕(德)을 불러서 대강 말하고, 또 아들 울(蔚)에게 이야기했다. 마음이 매우 좋지 못하여 취한 듯 미친 듯 진정할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일까. 병환 중에 계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했다. 종을 보내 소식을 알아오게 했다.'
'12일, 종 태문(太文)이 안흥량에서 와서 편지를 전했는데, 어머님께서는 기력이 쇠약하시나 초9일에는 어머님을 비롯해 상하가 무사히 안흥량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다가 법성포에서 잘 때 닻줄이 끌려 둥둥 떠내려가서 배에 머문 지 엿새 만에 서로 떨어져 있다가 무사히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다.'
'13일, 일찍 식사를 마친 뒤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도중에 홍 찰방의 집에 들렀다. 잠깐 이야기하는 사이에 울이 애수(愛壽)를 보내 아직 배가 도착한다는 소식이 없다고 전했다. 또 황천상(黃天詳)이 술병을 들고 홍백의 집에 왔다는 말을 듣고는 홍 찰방과 작별을 고하고 홍백의 집으로 갔다. 이윽고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고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날뛰었으나 하늘이 캄캄했다. 곧 게바위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었다.)'
'17일, 금오랑 서리 이수영이 공주로부터 와서 가자고 재촉했다.'
'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호곡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에 있으리오!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렇게 눈물을 뿌리며 길을 재촉해 초계에 도착한 이순신은 6월 8일 도원수 권율에게 신고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7월 17일까지 백의로 종군했다. 비록 계급은 무등병이었지만 이순신은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무장(武將)이었으므로 도원수 권율 이하 많은 관리가 찾아와 건강을 걱정하며 위로해주었다.
승첩제 기간 중 행사 참여차 노량에 정박 중인 해군 함정. 비록 작은 것이긴 하지만 군함을 자주 접하기 힘든 민간인에게는 국방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듯 했다. 세계에서 5번째로 이지스함까지 갖춘 충무공의 후예들은 세계 최강의 역량을 발휘할 것이다.
행사장에 있는 거북선 실물 모형.임진왜란이 발발되기 바로 전해인 1591년(선조 24) 2월 13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왜구의 내침을 미리 염려하여 본영을 비롯한 수군의 각 진(鎭)에 대해 전쟁준비를 급속히 강화하는 한편, 특수전투함인 거북선의 건조에 착수하였다. 특히 조선기술(造船技術)에 뛰어난 막하의 군관 나대용(羅大用)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임진년 6월 14일에 써올린 〈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에서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습니다[別制龜船]. 앞에 용두를 설치하여 아가리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꼬챙이를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해서, 비록 적선 수백 척이 있다 하더라도 그속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突擊將)으로 하여금 이 귀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들어가 천자포(天字砲)·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황자포(黃字砲) 등의 각종 총통(銃筒)을 쏘게 한즉, 산 위와 언덕 아래와 배를 지키는 세 군데의 왜적 또한 비오듯이 철환을 함부로 쏘아……"라는 구절로 거북선에 관하여 설명하였다.(위 내용 : 인터넷다음 사전에서 인용) 평저선이 대부분이었던 조선 수군의 배는 튼튼하고 강인했다. 반면 기동성을 강조한 왜군 배는 썰물 때는 갯벌에 갖히거나 넘어져 꼼짝도 못했다. 못을 사용한 왜군 배는 거북선을 앞세운 돌진에 취약했다. 대신 조선 수군의 배는 못 대신 목재 홈을 파 끼워넣는 식으로 제작되어 충돌에 강했다.
거북선 모형 입구에서 보초서는 왜군(?). 추운 날씨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있는 모습이 안스럽다.
거북선 내부의 장령방. 좀 더 근엄한 모습을 연출했더라면 더욱 훌륭했으리라.
거북선 내부의 현자 총통의 거치된 모습. 현자총통(玄字銃筒) 은 보물 제1233호. 당연히 사진 속의 대포는 모형이다.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하는 유통식화포(有筒式火砲)는 그 크기와 사용되는 화약의 양, 발사거리에 따라 4가지로 분리하여 천자문에서 그 이름을 따 천(天)·지(地)·현(玄)·황(黃)자총통이라 붙였는데, 이 것은 그 중 크기가 3번째에 해당하는 중화기이다.
1992년 전라남도 여천시 백도 근방 해저에서 파손된 지자총통, 별승자총통과 함께 끌어올린 것으로, 총 구경 6.5㎝, 전체길이 75.8㎝의 크기이다. 몸체에는 양내요동(梁內了同)이라는 제작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가정을묘명천자총통(보물 제647호)을 제작하였던 자이기 때문에, 이 총통의 제작시기도 조선 명종 10년(1555) 즈음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7기의 현자총통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화포사 연구는 물론 국방기술문화재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런 대포가 있었기 때문에 해전에서 승인이다.
위 아래 사진남해 대교 밑에서 떠나면서 인사 하는 해군 장병과 해군함의 모습. 그대들에게 우리 바다를 맡기노라.
가요제 모습.
위, 아래 사진 관중과 어울려 열창하는 가수 강민주의 모습. 그녀는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관중들의 열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위 아래 사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군민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사진 찍는 손도 얼었다. 날씨 핑계를 되지는 못하겠다. 작년에는 진눈깨비가 휘날렸다. 그런데 올해는 비교적 참여인원이 적었던 작년보다도 절반 이하의 관중이다. 지역민과 관광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형식적으로 보이는 행사는 혈세만 낭비한다.
바람에 휘날리며 외롭게 떠있는 대형풍선과 겹쳐저 보이지 않는 광고 문구. 썰렁한 식장 분위기 만큼이나 황량했다. 다양한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성의 가 없어 보이고 산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연히 찾아온 관광객을 제외하고 홍보가 제대로 되지 못했고, 주제가 모호했다. 차리리 이충무공 순국에 촛점을 맞추어 애국애족을 생각하는 주제 설정을 하던가 아니면 순수 관광 홍보목적이든 택일을 해야 했고 무사안일하게 예년과 비슷한 행사내용으로는 일반인의 눈길을 사로 잡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처음부터 행사를 주관한 제전위원회의 인사 말썽부터 전체 홍보를 안일하게 한 행정 당국 등은 문제점을 직시하고 새로운 각도로 재출발해야 한다. 추운 날씨만큼이나 황량한 모습의 승첩제는 어쩌면 관광 남해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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