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감성사진.冊香の感性写真

제7회 이충무공 승첩제 첫날 모습

책향1 2007. 11. 16. 18:54

 

감홍시 떨어지는 이 가을은 인생을 되돌아 보게 해서 좋다. 가끔 골목길에 떨어져 깨진 감홍시를 보면 아깝다. 누가 보지 않으면 마냥 주워 먹고 싶다. 떫은 감하나로 점심을 떼우며 10리 길을 뛰어가던 무렵  세상 모든 것이 먹는 것으로 보였다. 흰 '난닝구'가 감물에 젖고 떫은 맛에 목이 메이면 소금에 찍어먹어면 됐다.숨가쁘게 달려 왔지만 헛점 많은 인생을 누가 달래줄까? 이쁜 애인도 아니고, 집사람일까? 돈버는 재주를 포기한 무심한 남편을 책망하는 것도 잊은  집사람을 탓해서 무얼 하리. 그냥 주어진 인생 개척은 못하고 이충무공처럼 살다갈 수도 없는 현실이지만 탓만 하기에는 너무 주어진 시간이 없다. 낙엽 냄새나는 진한 커피나 짚단 �은 내 나는 보이차 한 잔으로 어쩌면 지식에의 목마름을 대신 �혀 본다. 젊음을 상징하던 끊임없던 그 갈망도 이제 회색빛 인생에 젖어 저멀리 달아나는 듯 하지만 잡을 기력도 마음도 사라진다. 가을이 지나간다. 귀뚜라미 소리에 애태우는 섬세함 보다 날이 차다는 감각이 우선이다. 끝없이 일렁이는 파도에 한 시름 날려 보내고, 그 허무한 노래 제목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를 되뇌이면서 내년 이맘의 자신을 추리해본다. 까치가 내려다 보고 있다. 귀뚜라미의 함성을 들어며...

  2007년 11월 16일부터 11월 18일까지 남해대교 밑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서 열린다. 밑의 사진 중 카메라 일자 조정이 잘못 되어 날짜가 다르게 나타났다.

 커피숍에서 본 식전 모습. 해군 함정 2대가 정박해 있고, 거북선도 보인다,. 거북선 윗쪽의 숲속에 이충무공 가묘가 있는 충렬사이다.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세 갈래 길이 나있는 오른쪽에 자암 김구의 적려 유허비가 있다. 사진상으로 거북선 뒤쪽에 보이는 기와집은 거창한(?) 화장실이다.

 

 커피숍에서 본 남해대교 모습. 한국 최초이자 한국에서는 가장 긴 현수교이며, 1969년 1월 준공된 완도교, 같은 해 12월 준공된 강화교, 1970년 준공된 안면교, 1971년 4월 준공된 거제대교에 이어 다섯 번째로 완성된 연륙교로서 부산·여수·마산·하동·남해 등 지역간 연결을 원활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해군과 그 주변지역, 한려해상국립공원 개발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92년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과 사천시를 잇는 창선-삼천포 대교가 준공되기 전까지는 남해군과 육지를 잇는 하나뿐인 다리였으며, 1973년 준공 때에는 교각의 색깔이 짙은 붉은빛이었으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1994년 잿빛으로 칠하였으며, 2003년 다시 짙은 붉은빛으로 단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남해대교 입구 안내 풍선모습. 이런 것을 한 단어로 뭐하는지 전문 용어가 알고 싶어진다. 애드발룬 이말은 아닐것이다.

 위사진 안내 팜플렛 표지.

아래 사진 안내장  안의 행사 안내.

 

 자암 김구선생 적려 유허 추모 비. 후방의 학생들은 백일장 행사 중 열심히 글을 쓰는 모습. 이비는 충렬사 오르는 길에서 오른 쪽에 있다.

김구(金絿.1488.성종 19∼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ㆍ조선 중기 4대 서예가. 본관 광산. 자 대유(大柔). 호 자암(自庵)ㆍ삼일재(三一齋). 시호 문의(文懿).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1507년(중종 2) 생원ㆍ진사에 모두 장원을 하여 시관을 놀라게 하였다. 151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正字)가 되고, 1515년 부수찬(副修撰), 1519년 부제학에 승진되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과 함께 투옥되고 개령(開寧: 경북 김천)에 유배되었다가, 해남(海南)에 안치(安置)되었다. 1531년 임피(臨陂: 전북 군산)로 옮겼으며, 1533년 풀려나와 고향 예산에 돌아가 이듬해 죽었다.

해남 등지로 13년간 유배생활 중 <화전별곡(花田別曲)>(경기체가 형식)을 지음. 시조 5수. 글씨에 뛰어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서울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고 한다. 선조 때 이조참판이 추증되고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 군산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이 비는 숙종30년 그의 6대손인 김만화가 남해 현령으로 부임하고 세운 비이다.

 

 자암 김구 선생 비 옆의 3도 통제사 가선대부 이태상의 비 중 이수 부분. 이수라 함은 비의 지붕부분을 말하고 하단부 기단 부분은 귀부라 한다. 보통 이수에도 귀면을 새긴다. 이유는 물론 역귀방지이고 영원히 보존하자는 의미이다. 귀부의 경우 영생을 뜻하는 거북 모습이 많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일반 대석이라 해도 무방하다. 南海忠烈祠(남해충렬사)는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마을 해안가 언덕 위 숲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1973년 6월 11일 사적 제233호로 지정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충렬사 본당은 맛배기와지붕에 기둥 6개 높이 2.9m 가로 3.69m 세로 2.76m 면적 10.18 제곱미터의 건물로 지어져 있고, 부속물로는 모정비, 비각, 충무공비, 충민공비, 청해루, 한글비, 내외삼문, 충무공가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1760년 충무공의 5대손인 통제사 이태상이 사우를 단청하였다.


남해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신 후 아산으로 운구 하기전 약 3개월가량 안치되었던 곳으로, 1628년 남해의 선비 김여빈과 고승후가 사당건립을 앞장서 여론을 일으키고 자기집 머슴을 거느리고 초가집 한칸의 사당을 세운 것이 그 시초이다.

1633년 남해현령 이정건이 忠愍公碑(충민공비)를 세웠고, 1658년 어사 민정중이 사당 건립인 김여빈의 소장 내용을 전해듣고 통제사 정익으로 하여금 사우를 신축하게 하였다.

1660년 사내에 ‘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 廟碑(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를 건립하였는데, 崇錄大夫 議政府 右成贊 宋時烈(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짓고 正憲大夫 議政府 左參贊 宋浚吉(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썼다.

1663년 현종4년 임금이 忠烈祠額(충렬사액)을 내렸고, 이 사실을 묘비 끝에다 추가하여 새겼다.

1760년 충무공의 5대손인 통제사 이태상이 사우를 단청하고 이층 문루의 淸海樓(청해루)를 세웠다.

1793년 충무공의 5대손인 전라좌수사 이명상이 충렬사를 찾아 참배하고 남해현령 이정건이 세운바 있는 誤記(오기)인 충민공비를 땅에 묻고 忠武公碑(충무공비)를 세웠다. 이 해에 충무공은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충렬사 쪽에서 본 식장 모습. 축제장 어딜가도 몽골 텐트가 보인다. 고속도로를 지나며 보이는 소도시의 몽골 텐트 역시 축제장임을 알려준다.

 

 식장의 수군 임무 교대 재현시 대북과 장군복으로 분장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