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어느 날

책향1 2012. 6. 11. 17:50

 

어느 날

 

어느 날 궁금하던 그녈 만났다. 아니 인터넷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았다.

경주 남산에서 일제시대 책에서만 보던 숲속에 쓰러진 유물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다. 뭐 도덕적이건 누구 잘못이던 서로 그리워함에 인위적인 장벽은 인습의 벽이다. 가장 두려운 건 카더라 통신으로 시작된 색안경이다.

그냥 그녀를 만나도 뜨거운 사이라고 소문이 날지 모른다. 지역에서 이미 공인 신분이 된지 오래다. 그녀도 예술가로 대접받고 있지만 그런 면보다 육감적인 면으로 먼저 느끼는 것이 남자 마음이거늘. 집안의 반대로 혼인에 이르지 못했다. 그전 5년간을 사귀어 오고 서울역 옆 분식집에서 만두를 먹다 한 개를 남기던 일이 첫 만남의 설레임처럼 남겨뒀다. 형이 입던 흑색 구형 바바리 코트로 멋을 냈지만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첫인상도 추억과 함께 남았다.

80년의 계엄사태에 논문으로 수업을 대체할 때도 그녀는 위력을 발휘했다. 83년 8월 좋아하던 계룡산을 올랐다. 장마가 한달 내내 지속되던 그 여름이었다. 그 산 헬기장에서 나란히 앉아 공주 쪽을 바라다 보던 추억은 오래된 흑백 영화의 한 장면이다. 그날 민박집에서 일은 나나 그녀나 영원히 잊지 못할 아픔이 된지 오래다. 목천면이 고향이던 그녀 아버지와의 첫 만남에서 차편 때문에 몇 시간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쁜 이미지를 남긴게 틀림이 없었다. 구 천안 고속버스 터미널은 그래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3년 천안 터미널에 도착하여 인근 아산군에서 직장의 터를 잡았고 10여년을 살았다.

아름다운 감상적 추억이라기 보다 집안의 반대 그 원인은 약속시간을 몇 시간 어긴 원죄가 시발이었을 것이다.(이부분에 대해서는 이 사이트 수필코너의 "갑사가는 길"을 참고) 아무렴 희망이 없어 보이던 3류 대학의 만학도 촌놈을 좋아 할리가 없었겠지. 하지만 뚜렷한 목표 하나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정의감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래서 어릴 적 꿈이던 대학교수나 기자가 될 목표는뚜렷했다. 그 지름길로 유학을 계획했지만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사정, 가난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다. 은사이신 스님이 "너 일본가서 한국절에 기거하며 무료로 학교 다닐려면 머리 깎아라"는 유혹아닌 권유에도 "공부를 위한 머리는 깎지 않겠습니다"라고 당돌하게 외치던 못난 나였다.

다시 말하자면 돈 때문에 입산하는 일은 없다는 말. 25년이 지난 지금이나 그때나 돈은 인연이 없는 것은 매 한가지다. 인생을 위해 불필요한 정의감은 가끔 감출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그 때 얻었지만 순간적인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무런 취업 대책없이 졸업은 하였다. 그해 1984년 첫 개장하던 흑석동 한강변 원불교구당 예식장에서 결혼부터 할 에정이었다. 그해 3월 일본 대학원 입학을 계기로 일본유학의 꿈을 이루려 노력하던 중 뜻하지 않았던 결혼반대라는 장애물을 만났다.(이 내용은 수필코너의 상게 글 참고) 외형상 시골 촌뜨기에 가난하기 짝이 없던 만학도에게 누가 고이 키운 딸을 줄것인가. 집안도 당시 빵빵한데.

결국 결혼을 포기하고 공채로 신문사 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반대를 심하게 하던 그녀 아버지도 업무상 만나기도 했지만 그 땐 결혼이 불발한지 2년이 지난 후였다. 소식도 모른 채 직장일에만 몰두하다가 또 10여 년을 보내고 언론사를 퇴직하고 남해로 와 12년이 지났다.

결혼하기로 한 후 30년이 지난 세월이다. 완전하지 않은 사람이라 늘 머리 속에는 혼자만인 일종의 죄책감이 도사려 있었고 그 결과 그녀가 궁금했다. 결혼 반대를 이겨내지 못했고 그녀를 인격 살인 한 듯한 느낌은 나를 늘 우울하게 했다. 상견례 이후 서울로 떠나던 동대구역에서 울던 그녀의 모습을 잊지못했다. 외견상 따뜻하지도 다정하지도 않던 예의 투박함은 그대로 느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골 식구들도 좀 근사하게 꾸미고 했으면 다른 결과가 있을 수 있었다. 일철에 바쁜 와중에 농사일하다 그냥 나온 모습에 도시에서만 살던 그분들의 실망감을 미리 알았으면 좋은 결과도 나올 수 있었다. 지난 잘못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실 그대로의 정의감만 앞세우던 모습과 당시에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제 서핑하다 30여년이 지난 모습을 사진으로 보게 되었다. 당시 은행원이 이제 저명 예술인이 되었다. 어디서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보고픔은 인습의 장벽에 갖혔으리라. 그냥 사진으로 만족해야지. 할 말도 없는 지금이야 가만히 있는게 서로에게 좋다. 실질적으로나 이성적인 냉철한 판단으로 만날 이유도 없다. 지난 감성은 감성으로 그치는게 옳다. 내가 버림받았지만 그래도 버렸다는 알수없는 죄책감이 괴롭게 하는 중이다. 그래서 동명이인도 좋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