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소 김용考
태소 김용에 대한 남해 유배설이 남해지역에서 지금까지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필자도 간여한 근간 『남해군지』에 대한 남해 유배설을 근거로 기술된 내용에 대해 남해역사연구회 부회장인 김창렬씨의 「1억원 넘게 들인 남해군지 실망스럽다」제하의 인터넷 기사를 시작으로 전면 부정되기 시작했다. 남해 지역에서 논쟁의 시발은 차치하고 도심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남해읍 중심지의 김용에 대한 기념물과 그 동안 저술된 유배 관련 여러 서적에도 남해 유배설을 논술했기 때문이다.
일부의 주장에 의하면 남해 지역 역사의 텍스트 격인 이청기 선생의 『사향록』에 기술 된 내용을 근간으로 김우영씨의 향토사 바로알기에서 유배설을 주장하여 이견없이 답습 작성됐다고 한다. 물론 저자들의 고의성은 전혀 없다.
지역사를 연구하다보면 항상 사료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큰 오류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남해관련 그의 시로 추정되는 작품들을 보면 직접 남해 풍물을 접하지 않고 썼다고는 볼 수 없는 정황도 있다. 다만 남해 관련 시에 대한 깊은 연구 없이 글을 적는 필자도 또 다른 주장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역사연구가와 정치인이 가장 많은 거짓말을 한다는 말을 누구나 충분히 이해력을 구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주로 논쟁의 근거가 된 사료는 『태소집』의「남천잡록」이다.
김용의 남해 유배설에 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었으나 화전사바로알기모임 김우영(金楀永)의 노력으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김용에 대한 인적사항이 언급된 곳은 조선문과방목, 각종사전, 국조인물고, 성씨의고향 등에는 상세한 기록이 없고 사전(事典)에 태소집이 소개되어 있다. 부친 김수경(金壽卿.자 이한재[頤閒齋]. 府使)은 성씨의 고향에 관직이 언급되어 있다. 김용의 태소집(太疎集)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김 용은 조선후기 문신이고 학자로서 생몰연도는 알 수가 없고 본관이 안동이다. 자는 준경(駿卿)이고 호는 태소(太疎)로 태소는 영조 40년(1764)에 승정원 주서, 영조 43년(1767)에 사간원 정원, 사헌부 지평을 지냈고 영조 47년(1771)에 남해로 유배와서 남천잡록을 저술햇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설이다. 관직의 시작은 조선문과방목 입격자 명단에 없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음사로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그리고 시문을 통해볼 때 남해 유배를 부친의 죄를 대행한 것 같다. 유배 당시 김용 역시 나이가 많은 고령이었으며 6개월 정도 유배 생활을 한 것은 틀림이 없다.
영조실록 내용과 태소집에 나오는 내용과 상이하다. 즉, 태소집에 영조 43년(1767)에 정원, 지평의 관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실록에는 영조 41년(1765)에 지평 김용이 귀양을 청하니 윤허하였고 영조 44년(1768)에는 갑산부에 정배했다.
영조 41년(1765) 5월 19일. 지평 김용(金容)이 상소하여 그의 아버지가 매우 늙은 정상을 진달하고 귀양(歸養)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조 44년(1768) 6월 10일. 정언 김용(金容)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논사(論思)의 신하가 품고 있는 생각을 말씀드렸다가 죄가 그 일신에 더해졌고 동당(同堂)의 친척에게까지 미쳤으며, 이목의 관원이 일에 따라 진언(盡言)하자 귀양을 보내고 또 가장 가까운 일족(一族)에게까지 벌을 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끝내 추천한 전관(銓官)까지도 파직의 중한 벌을 당하였으며, 혹은 대각의 신하로 하여금 일에 대해 말하는 신하를 반박하기도 하였습니다. 저 전관(銓官)은 못난 부류들만 구하여 언로의 임무를 구차하게 채우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에서 대각을 설치한 뜻이겠습니까? 임금에게 비위를 거슬리는 말을 하면 지나치게 격노하시고, 당시 재상을 논핵하면 협잡으로 지목하여 작으면 내쫓고 크면 귀양을 보내고 있으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전년에 한 명의 간관(諫官)을 내쫓고 금년에 한 명의 어사를 내쫓는다.’고 한 말과 불행히도 비근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영조 44년(1768) 6월 10일. 임금이 숭정전의 월대에 나아가 상참을 거행하고, 아울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소학(小學) 제사(題辭)의 강(講)을 마치고 말하기를,
“김용(金容)이 무슨 일을 말하였는가?”
하니, 좌부승지 조덕성(趙德成)이 말하기를,
“호조 판서 이사관(李思觀)은 관직을 삭탈하고 이산 부사(理山府使) 이성묵(李性默)은 체차할 것을 청하고, 끝에 가서는 이겸빈(李謙彬)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논하는 말은 무어라고 하였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사관은 비루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이성묵(李性默)은 어리석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김용을 갑산부(甲山府)로 정배하되, 배도 압송(倍道押送)하라고 명하였다. 는 내용이 영조실록의 내용이다.
다음은 규장각에 소장하고 있는 태소집에 관한 내용이다. 태소집은 시문집으로 책머리에 자서(自序)가 있으나 편자 및 편집 경위에 대한 기록이 없고 편집 체계도 정리되지 않은 초고본이다. 권1-4는 변(辨)·논(論)·서(序)·기(記)·전(傳)·서(書)·제문·제발(題跋)·설(設)·명(銘)·송(頌)·찬(贊)·책(策)·묘지·가장(家狀)·혼서(婚書)·제례(祭禮)·소문(疎文)·잡저이고 권5~8은 시(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천잡록은 유배생활 중 보고 들은 것과 반성을 기록한 것이다.
규장각 태소집 해제에 실린 내용을 옮겨 놓았다.
太疎集(奎15501), 金容(朝鮮)著. 5卷 1冊 木板本 27×16.5cm. 四周單邊 半郭:16×12.8cm. 13行 20字 注雙行. 版心:上下大黑口, 上下下向魚尾. 太疎 金容(生沒年 未詳)의 詩文集이다. 文集의 체계가 잡히지 않았고 序文·跋文이 없어 간행 여부를 알 수 없으며 무엇을 臺本으로 하여 筆寫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저자는 내용으로 보아 ≪奎章閣圖書目錄≫과는 달리 金容(목록에는 金容駿으로 되어 있음)임을 알 수 있다. 金容은 英祖 때의 사람인데 上洛府院君 士衡의 後孫으로 養閒齋 壽卿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駿卿, 호는 太疎, 본관은 安東이다. 상소문으로 보아 1764년(英祖 40) 注書, 1767년 正 言 持平 등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卷頭에 文에 對한 自序가 謙辭의 뜻으로 짧게 실려 있다. {卷1}:文으로 1744년(英祖 20)에 쓴 古簡帖辨이 있는데 그 내용은 古簡帖의 次序 관계를 논한 글이다. 이어서 漢高封盧관燕王論, 耆壽會序, 受月軒記, 龍香伯傳, 贈李美叔序, 代韓生上吏部尙書書, 祭伯父僉正公, 題謙齋畵扇, 送友人西遊洛中序, 祭仲 父郡守公文, 改名辯, 祭老阿母文, 祭從兄文, 祭內兄柳長汝文, 雲嵐山行記, 祭外姑孺人 李氏文, 寓慕窩記, 羅山夜話序, 代再從兄晦卿甫哭梁秀士文, 農巖詩抄後序 등이 차례로 실려 있다. 이상 21편의 文은 1744∼1758년간에 저술된 것으로 연대별로 싣고 있다. 이어서 祭式 圖式 5편(忌祀, 茶禮, 墓祭, 薦新, 示龜羽象)이 있는데 家祭에 관계되는 것으로 圖象은 없고 글만 적혀 있다. 이어서 猛獸說, 讀尤齋先生年譜, 祭某日文, 園葵 銘, 麥頌, 耽羅赤點??贊 등을 모두 年度別로 실었다. {卷2}:文 18편(御題問科弊殿策, 擬宋拜司馬光爲門下侍郞制, 書東州唱酬錄後, 擬九州貢賦奏, 書過客詩軸末 등). 대체로 1760∼1764년까지의 글인 것으로 보인다. {卷3}:文 20편(當저御製親筆後跋, 祭仲母淑 人全州李氏文, 名三兒說, 告龍卿墓文, 與趙尙書暾書, 與趙參判엄書, 歎息, 謫舍記夢, 題同春先生眞蹟後, 傳家帖跋). 대체로 1765∼1769년까지의 글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卷4}:文 24편(書筵日記, 官齋夜坐書懷, 諭沃邑民人文, 南遷雜錄, 禁推原情, 掌 樂主簿參常參所懷, 論左相尹東度及備堂疏, 論李思觀兼救李謙彬疏, 擬救山林疏, 正言詣 등). 1770∼1771년까지의 글이 앞에 있고 그뒤에 1764∼1770년까지의 상소문이 있다. 「南遷雜錄」은 남쪽으로 유배되어 가서 겪은 諸事를 기록한 글이다. {卷5}:詩 138수( 喜雨, 全義道中 등). 권두에는 시에 대한 自序가 짧게 실려 있고, 詩도 거의 연도별로 실은 것인데 1744∼1761년까지의 詩다. {卷6}:詩 107수(廣寒樓, 端午曉向書齋洞 등). 1752∼1768년경까지의 作. {卷7}:詩 114수(戊子六月上封事有感而作, 駱山春望 등). 17 68년 이후의 作인 듯하다. {卷8}:詩 110수(登鄭大受詩壇追述寄示, 秋風悔心萌 등). 연도가 밝혀져 있지 않다.
태소집 권4에 실린 남천잡록에 의하면, “남으로 유배를 왔다. 봄에는 화전놀이 한창인데,(僕之南遷也····春序行將盡矣花事····) 칠월 칠석 무렵에 사면되었다. 한여원(韓汝元) 집에서 반년이나 몸을 위탁하였으나 하루아침에 헤어지게 되었다(七夕始有宥放之命····汝元向渠家半年相守一朝分離啇落落便···)”라고 하였으니 1~2월에 유배 와서 7월까지 약 반년정도 남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남천잡록에 기록된 유배생활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보면,
남해로 유배 올 때 가지고 온 것은 동파별집(東坡別集) 1권과 정절집(靖節集) 1권이었다. 무료함을 보내기 위해 매일 쉬면서 여러 편을 펼쳐 보는 것이 일과였다. 때로는 적막함을 잊으려고 적소에서 여원과 2-3년 전의 얘기를 주고받는데 여원은 말이 없어 듣기만 하기에 태소가 꾸짖으면 웃기만 하였다.
봄이 되어 꽃놀이가 한창인데 주인과 하인들의 거동과 차림새가 한심하였지만 방관할 수밖에 없었고 죄인이라 출입을 삼가 하였다. 태소의 적거생활이 어려웠다는 것이 나타나는데 나물먹고 물마시고 나뭇잎으로 글을 쓰는 등 궁색함이 매우 심했으나 스스로 목숨을 위탁하여 살아가니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밥을 지어 시중할 사람이 없어 여러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수발을 하였고 타성재(嶞城宰)와 김백우(金伯遇)는 서로 쌀가마를 부쳐 주었고 원성(原城)·괴산(櫆山)에 있는 두 사촌은 자주 양식과 반찬거리를 도와주니 노비·머슴·우마군 들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살림살이를 도와주었다. 다행히 풍토병이 심하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태소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유배 중에서도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고 병고가 겹쳐 가까이 있는 의원이나 약국일지라도 지팡이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니 언제나 집안 일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남쪽 향인들과의 교유관계도 나타난다. 이 간사(諫士:벼슬이름)는 관직에서 물러나 태소 적소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서쪽마을에 살면서 한두번 왕래하였고 김치응(金稚膺) 학사의 집은 서쪽 들판에 있어 스스로 찾아가면 선비의 품도로 환대해 주어 산책 삼아 자주 왕래하였을 뿐 아니라 영소정(靈沼亭)에 올라가 담소하며 한나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태소는 나이가 늙고 병중임을 알 수 있다. 유월에는 책을 멀리하고 옛 노래 여러 편을 읊으면서 혼자 거닐며 나무 그늘에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외로움에 생각만 깊어지고, 칠석 무렵에 죄가 사면되었으나 삼복중에 병으로 누워 있어서 움직일 수 없다가 심정자(沈正字)의 부축으로 일어났다. 도랑 가에 있는 여원의 집에서 반년이나 몸을 위탁하였으나 어명으로 유배에서 풀려나니 하루아침에 헤어지게 되었다.
반년의 짧은 유배생활이지만, 향인들과의 교유관계와 생활의 어려웠던 유배생활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남긴 여러 시문 중 금산에 올라(登錦山), 홍문(虹門), 감로수(甘露水), 금산에서 내려오다 만난 비(下錦山遇雨), 노인성(老人星), 노량충렬사(露梁謁忠武祠) 등 헌시를 소개한다.
한시를 한글로 번역한 내용이다.
금산에 올라(유배에서 풀려나 남해를 떠나기 전 8월중에)
이 산 천길 높이 솟았으되 허황된 것 아니로세
동남으로 높이 솟아 스스로 으뜸이 되었는데
동서남북 끝으로 모두 물이 잠겼네
하늘 높은 가을 8월에 이미 참바람이 부는구나
스스로 한평생 온갖 세상 떠돌았는데
오늘은 해중에 돌아와 있음을 알겠노라
한밤중 별무리 땅속에서 솟아나고
자색구름 어느 곳으로 신선을 찾아 가는가?
금산 바위 끝에 구름 몰려들어 날씨 어두워지네
구월도 못된 이 팔월 단풍은 이미 물들고
남극성 가을 바다위로 떠오르는데
북쪽으로 떠날 길손 밤하늘 쳐다보네
온몸 늙은 돌 어느 세월에 희여지랴
몇 떨기 연꽃송이 산봉우리에 피어 있는데
만약 이제 선인을 만날 수 없다면
장생불사 약 이야기를
돌아가는 배 안에서 물어볼까?
홍문(신선들의 옷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아 삼신산이 가까이 있다)
백발(百丈) 무지개다리 하늘에 이어졌으니
몇 년을 두고 선인들이 바다를 건너 다녔을까?
삼신산이 여기에서 멀지 않음을 알겠거니
선인들의 깃옷이 종일 바람에 나부끼네
감로수(신선들이 마시는 금산 상사암과 구정봉에 있는 감로수)
여섯 구멍에서 나는 물 가득하니
맑은 날이나 장마비에도 늘고 줄어드는 일 모르겠네
어찌할꼬 사람이 내리는 비 아니기에
바위 속에서 흘러내리는 물 늙은 선인이 마시네
금산을 내려오다 만난 비(봉래산[삼신산의 하나]에 신령들이 머문다기에)
웃으면서 헤어진 봉래산(蓬萊山) 십리 길에
갑작스런 산비 만나 풀 옷 다 젖었네
신령들 오늘 다시 머문다기에
구름에 젖은 발길 반쯤에서 돌아서네
노인성(남해사람이 장수하는 것은 노인성을 보기 때문이다)
둥글기는 반달 같고 붉기로는 해와 같고
봄 저녁, 가을 아침 두 번씩 찾아오네
남해사람 장수하는 까닭을 듣고 보니
해마다 높은 곳(금산산봉)에서 노인성을 봄이로세
노량충무사(충렬사) 헌시(충무공의 뛰어난 공적·영웅의 기개에 파도도 노한다)
충무사당 노량 들머리에 있어
문 앞에 다다르니 남해 바다 푸르네
매양 생각하던 감개 오늘에야 이루니
읊조리던 시 깨닫지도 못하고 이 나이 되었는데
공의 뛰어난 공적 남기신 말씀 참으로 장할시고
영웅의 기개 파도도 노하는구나
초노(初老)의 늙은이 더욱 늙어 돌에 새기니
사당을 참배하는 나그네 옛시조 읊조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