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김씨 선조이야기

문절공과 선조 이야기

책향1 2009. 6. 27. 19:51

문절공과 선조이야기

 

신라의 왕족인  의성김씨는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의 넷째아들 김 석(金 錫)이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外孫)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1) 

고려개국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의성김씨는 8世 상서복야(尙書僕射) 김공우(金公祐)의 아들대(代)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의 기틀을 다졌는데, 장자(長子)인 9世 용비(龍庇)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諂事)를 지내고 추성보절공신(推誠保節功臣)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었고 의성군 백성들이 公의 공덕을 기리는 진민사(鎭民祠)를 세워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봉행하였다가 그후 본손(本孫)들이 인수하여 오토산(五土山) 묘하(墓下)에 묘우와 재사를 건립하여 항례하고 있는 의성김씨의 중조(中祖)이다. 2)

차자(次子) 용필(龍弼)은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의 벼슬을 지내고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3)

막내 용주(龍珠)는 4대 왕조에 걸쳐 벼슬을 지냈는데 여진(女眞)의 난을 평정하여 추충공신(推忠功臣)에 녹훈되고  개성부사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후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짐으로써 명성을 날렸는데 이들 형제대인 9世에서 세계(世系)가 갈린다. 4)

고려조에서 의성김문(義城金門)을 빛낸 인물로는 9世 성단(成丹)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흥(興)이 선략장군(宣略將軍)를 지냈으며, 용비공(龍庇公)의 맏이 의(宜)가 상장군(上將軍)을,  굉(紘)이 상서복야(尙書僕射)를 지내고 의성부원군(義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英)이 전객시(典客寺) 판사(判事) 및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5)

또한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훤(暄), 중서문하평장사를 지낸 춘(椿),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연(衍), 정의대부(正議大夫) 좌사의(左司議) 옥(玉), 영(英)의 장손(長孫)으로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지낸 광부(光富), 광부(光富) 의 아우인 이조참판 수덕(修德), 자헌대부(資憲大夫)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낸 경복(慶復), 좌사윤(左司尹) 태권(台權), 공조전서(工曺典書)를 지내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중간본(重刊本)의 발문(跋文)을 쓸 만큼 문장이 뛰어났던 13世 거두(居斗)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조선조에서 우의정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거익(居翼) 등이 명문의 대(代)를 이었다. 6)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의성김씨는 조선조에 와서도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 부지기수였다.  옥(玉)의 아들 현주(玄柱)가 찬성사(贊成事)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고, 영렬(英烈)은 고려조 전서(典書)를 지내고 조선조에는 좌찬성을 지낸후 우의정으로 증직되어 학림서원·옥산서원·신천서원 등에 봉향되어 있다. 

내성재(內省齋) 용초(用超)는 수덕(修德)의 자(子)로서 고려조 밀직부사를 거쳐 조선조에는 병마절제사를 지내고 문절(文節)의 시호를 받았으며, 존성(存誠)의 아들 효손(孝孫)은 세종때 병조참의(兵曺參議)를 거쳐 형조·예조 참판(參判)을 지내고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을방(乙邦)은 고려의 문신으로 국운이 다하자 통곡하며 예안(禮安)의 요성산(邀聖山)으로 내려가  초당(草堂)을 짓고 은거하였는데 조선조에서 수차에 걸쳐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며 불취하자 그가 살던 마을을 둔번리(遁煩里)라 불렀다고 한다.  
흠조(欽祖)는 단양·제주 등지의 목사(牧使)를 역임한 후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윤석(潤石)은 청송부사(靑松府使)로 나갔다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7)

그 외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미(湄)와 숙검(叔儉), 판교(判校)를 지낸 양중 (養中), 고려조에 판도판서를 지내고 조선때 자헌대부·이조판서·홍문관대제학을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남보(南寶), 대사간(大司諫) 축(軸), 전라도관찰사·대사간·대사성 등을 두루 역임한 경조(敬祖), 안동부사를 지낸 자한(自漢), 통훈대부와 이조참의를 지낸 사언(士彦), 사헌부 집의와 군수를 지낸 세우(世瑀), 성균관 사성(司成)과 사옹원 정(正)을 역임한 익령(益齡) 등 의성김문(義城金門)을 드높인 인물들이 너무  많아 모두 열거가 힘들 정도이다. 8)

조선중기에 명문(名門) 의성김씨를 더욱 빛낸 인물은 모재(慕齋) 안국(安國)과 사재(思齋) 정국(正國) 형제를 들 수 있다. 안국(安國)은 1478년(성종9) 참봉(參奉) 연(璉)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사 학문을 닦고, 예조참의(禮曺參議) 등을 지내고 경상도·전라도 관찰사로 나가 각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권장하고 "벽온방", "창진방" 등을 간인(刊印)하여 보급하였다.

특히 그는 천문(天文)·주역(周易)·농사(農事)·국문학(國文學)을 비롯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당시 유명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루었고,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대사헌·대제학·좌찬성을 역임하였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 ‘모재가훈(慕齋家訓)’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사후에 문경(文敬)이라 시호하고 오산서원·임강서원·기천서원·빙계서원·설봉서원에 제향되었다. 9)

안국(安國)의 아우인 사재(思齋) 정국(正國)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글을읽고, 1509년(중종4)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관찰사로 나아가서는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고, 병조·예조·형조의 참판을 지낸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문(詩文)이 당대에 뛰어났고 의서(醫書)에 조예가 깊어 ‘성리대전서절요’를 비롯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겨 형과 함께 후세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문목(文穆)이라 시호하고 오산서원·임강서원·문봉서원에 배향되었다. 10)

김관석(金關石)은 호(號)가 사우당(四友堂)으로 부(父)는 장사랑(將仕郞) 윤적(允迪)이다. 사우당은 효성스러운 천성과 덕망을 갖추었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경향(京鄕)에 칭송되었고 사후에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는데 처음으로 성주군 수륜면 윤동(倫洞)에 터를 잡았다. 김제민(金齊閔)은 호(號)가 오봉(鰲峯)이며 당대의 명신(名臣)이었던 이 항(李 恒)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군수와 승지를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충강(忠剛)의 시호를 받았으며 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11)

또한 청계(靑溪) 진(璡)은 사마시에 합격 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후학을 길렀는데 아들 5형제가 모두 당대의 거유(巨儒)인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맏이 극일(克一)과 넷째 성일(誠一) 그리고 막내 복일(復一)은 대과에, 둘째 수일(守一)과 셋째 명일(明一)은 소과에 합격하여 세칭 5룡(五龍)집으로 칭송받았으며 진(璡)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극일(克一)은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수일(守一)은 찰방(察訪), 명일(明一)은 효행(孝行)이 지극한 학자(學者)로 유명했고, 성일(誠一)은 호당(湖堂)에 뽑혔고 정언(正言)을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뒤 부제학(副提學)·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고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임란때는 초유사(招諭使)로 참전하여 의병을 모아 진주성(晋州城)을 사수하다가 병사했다.  학봉은 사후에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임천서원·호계서원·사빈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복일(復一)은 전라도어사(全羅道御使)와 울산군수·풍기군수·창원부사 등을 지냈으며 안동의 사빈서원에  제향되었
다. 12)

한편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칠봉(七峯) 희삼(希參)은 아들 넷 중 우홍(宇弘), 우굉(宇宏), ‘우옹’ 3형제(三兄弟)가 문과에 올라 4부자(四父子) 모두가 대과에 오른 유일한 의심김씨 집안이다. 

이계(伊溪) 우홍(宇弘)은 목사(牧使)를, 개암(開巖) 우굉(宇宏)은 대사성과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상주의 속수서원에 제향되었다. 특히 동강(東岡) ‘우옹’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문하의 대유학자로 전라감사·안동부사·이조참판·병조참판·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한 청백리(淸白吏)였는데 사후에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대가면 옥화리에 동강신도비가 있으며 청천서원·회령서원에 배향되었다.

서계(西溪) 담수(聃壽)는 사마시에 합격한 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은 유학자였으며 이에 조정에서 ‘황계처사’를 내렸고 사후에 청천서원·낙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충강공 제민(齊閔)의 손자인 지수(地粹)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부사(府使)를 지냈는데 고매한 인품으로 명망을 얻어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시호는 정민(貞敏)이며 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또한 수찬(修撰)을 지낸 여건(汝鍵), 대사간과 대사성을 지낸 방걸(邦杰), 군수·부사·목사·병조참의를 역임하고 임호서원에 배향된 용(涌), 동강(東岡)의 손자로 군수·도호부사를 지낸 사월당(沙月堂) 욱(頊), 외직으로 부사·목사를 내직으로 도승지·참판 등 4朝에서 참판을 지낸 의성김씨의 대표적 관료였던 ‘빈’ 강원도관찰사·대사성을 지내고 후손에서  문과급제자 19명이 배출된 팔오헌(八吾軒) 성구(聲久), 승지·호조참판을 역임한 택수(宅洙), 관찰사를 지낸 한동(翰東), 경상도사를 지낸 직(直), 부사·병조참판 희주(熙周), 임진왜란시 의병장이었던 사봉(沙峯) 천택(天澤) 등도 의성김문을 더욱 빛낸 인물들이였으며, 동학의 3장두였던 김도삼 역시 의성김씨의 기개를 드높인 인물이다. 13)

한말(韓末)에 영수(永銖)는 군수와 경주병마절제사(慶州兵馬節制使)로 재임하여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고, 철종(哲宗)때 “북천가(北遷歌)”를 지어 국문학상(國文學上) 중요한 업적을 남긴 진형(鎭衡) 및 예조참판 사굉(士宏)과, 동강(東岡)의 12대손으로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김우옹-이진상-곽종석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하였고 50여년동안 1,000여명의 문도(門徒)를 배출하였으며 2000년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건립된 도양서원에서 향사하고 있는 중재(重齋) 황(榥) 등이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의성김씨의 후손에서 구한말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지사·열사·의사는 단일성씨 중에서 가장 많았다. 영남유림(嶺南儒林)의 거두인 서산(西山) 흥락(興洛)은 수차에 걸쳐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후진양성과 학문에만 전력하여 707명의 문인을 배출했으며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의병을 총지휘한 애국지사로 후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도화(道和)는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을미사변에 창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제천의 유인석·서상설 등과 연합전선을 펴 일본군과 싸웠고 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해운당(海雲堂) 하락(河洛)은 의병대장으로 위훈을 세우고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또한 항일애국활동으로 기개를 떨쳤던 원식(元植)은 1968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고, 일송(一松) 동삼(東三)은 경술국치후 이상룡(李相龍)과 더불어 만주에서 백서농장(白西農場)을 개척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을 역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하였으며 해방 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붕준(鵬濬)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비서장·임시 의정원 의장 및 해방 후 좌우합작 우측대표·신진당 창당위원장을 역임하다 납북되었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14)

특히 심산(心山) 창숙(昌淑)은 동강(東岡)의 13대 주손인데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사도실)  출생으로 한국의 대유학자이자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리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후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儒林團陳情書)를 휴대하고 상해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수감생활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申采浩)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대만의 ‘손 문’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

1927년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전국유도회(全國儒道會)를 조직하여 회장 및 성균관장을 지냈으며, 성균관대학을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고 그 뒤 성균관대학교 초대총장을 지냈다.

6·25전쟁 후 이승만(李承晩)의 하야(下野) 경고문 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李始榮)·김성수(金性洙)·조병옥(趙炳玉)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하여 권력비호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다. 1962년 卒한후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는 한편 성주군청 바로 옆 심산기념관을 세워 공덕을 되새기고 있다.

의성김씨에서는 조선조에 96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었는데, 이는 김씨씨족 중에는 경주김씨(慶州金氏)·광산김씨(光山金氏)·연안김씨(延安金氏)·김해김씨(金海金氏)·청풍김씨(淸風金氏) 다음으로 많은 수이며, 봉군(封君)이 7명, 시호(諡號)를 받은 이가 13명, 문형(文衡)과 호당(湖堂)이 각 5명, 청백리(淸白吏)가 3명으로 명문거족의 지위를 누렸다. 15)
 
의성김씨의 분파는 9세조를 분파조(分派祖)로 하여 5개 대파(大派)로 나누어진다. 김용비(金龍庇)의 후손이 첨사공파(詹事公派), 김용필(金龍弼)의 후손이 수사공공파(守司空公派), 김용주(金龍珠)의 후손이 충의공파(忠毅公派), 김성단(金成丹)의 후손이 찬성사공파(贊成事公派),   김 흥(金 興)의 후손이 선략장군공파(宣略將軍公派)이다.  

첨사공파(詹事公派)는 김용비(金龍庇)의 아들로서 상장군을 지내고 복야(僕射)로 추봉된 10世 의(宜)의 후손이 복야공파(僕射公派)로 불리는데 고령과 안동을 비롯해 영천·포항·군위·김해·부여·청원·청양·보령·고창·정읍·수원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으며, 그 후손중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송암(松菴) 김 면(金 沔)장군이 충절(忠節)으로 가문을 빛냈다.

의(宜)의 아우로 의성부원군(義城府院君)에 봉해진 굉(紘)의 후손은 부원군파(府院君派)로 불리는데 장성·강진·해남·광주·충주 등 각지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굉(紘)의 아우로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 贊成事)를 지낸 영(英)의 후손인 찬성사공파(贊成事公派)는 일부가 13世 용초(用超)의 대부터 성주군 대가면(안터)에 정착하였고 마을입구에 유허비가 있으며, 성주와 고령, 영천·김천·청송·합천 등지에도 후손들이 옮겨갔다.

수사공(守司空) 김용필(金龍弼)의 아들인 윤관(允寬)의 후손들은 주로 북쪽에 많이 살고 있으며, 충의공(忠毅公) 김용주(金龍珠)의 후손들은 개성(開城)에서 살다가 충북 옥천 등지로 옮겨와 세거하고 있다. 김성단(金成丹)의 후손인 찬성사공파(贊成事公派)는 선대부터 세거해온 의성에 많이 살고 있고, 김 흥(金 興)의 후손인 선략장군공파(宣略將軍公派)는 합천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현재 의성김씨(義城金氏)는 전국 약 8만가구 약 26만명이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며, 대표적인 집성촌으론 경북 의성군 단촌면·사곡면, 충북 괴산군 칠성면, 충북 음성군 음성읍, 경북 안동군 임하면 및 일직면, 경북 봉화군 봉화읍, 성주군 수륜면(윤동) 및 대가면(안터, 사도실)이다. 성주군 지역에는 약 400여가구 1천여 의성김씨 종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의성김씨의 지파(支派)는 수십개로 나누어지는데 경북지역 특히 성주지역에 거주하는 후손들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첨사(諂事)를 지낸 9世 내성재(內省齋) 용비(龍庇)의 아들이자 찬성사를 지낸 영(英)의 후손인 찬성사공파(贊成事公派)는 일부가 13世 문절공(文節公) 용초(用超)의 대(代)부터 성주군 대가면(안터)에 입향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수륜면 수륜리(윤동), 대가면 옥성리(안터) 및 칠봉리(사도실), 초전면 자양리(내동), 용암면 마월리(마천)과 덕평리(위동), 성주읍 용산리(조지뫼)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수륜면 윤동에는 13世 문절공(文節公) 용초(用超)와 입향조인 18世 사우당(四友堂) 관석(關石)을 존모하는 세덕사(世德祠)와 원모재(遠慕齋)가 있다. 
 
문절공(文節公) 용초(用超)의 손자인 15世 종사(宗師)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귀손(貴孫)·중손(仲孫)·윤손(允孫) 및 교위(副尉)를 지낸 계손(季孫) 등 아들 사형제(四兄弟)를 두었다.
귀손(貴孫)의 손자인 18世 사우당(四友堂) 관석(關石)도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장자(長子)인 19世 담노(聃老)는 증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贈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했으며 호(號)가 백와(栢窩)이다. 백와(栢窩)의 장자(長子)로 의병장을 지냈으며 덕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천택(天澤)의 후손은 사봉공파(沙峯公派)로 수륜면(윤동)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사봉공(沙峯公)의 아들 5형제중 3자(三子)인 청음공(靑陰公) 시영(是榮)은 영풍군수 등 3개 고을의 수장을 지내면서 선정으로 명망이 높았다.   

선무랑 군자감주부(宣務郞 軍資監主簿)을 지낸 천설(天渫)의 후손은 계봉공파(溪峯公派)로 대가면 용성리(안터)를 중심으로 거주하는데 계봉공(溪峯公)의 증손(曾孫)인 중남(重南)은 대과합격후 지방행정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중남(重南)의 아들인 원명(遠鳴)역시 대과급제후 지리학박사(地理學博士) 등을 역임했다.  
성호(星湖) 천해(天瀣)의 후손은 전적공파(典籍公派)로 합천 및 칠곡에 세거하며, 좌부장(左部將)을 지낸 천호(天灝)의 후손은 부장공파(部將公派)로서 수륜면(윤동)에 거주한다. 16)

사우당(四友堂)의 차자(次子)인 19世 담년(聃年)은 호(號)가 계와(溪窩)이며 장사랑(將仕郞)를 지냈다. 계와(溪窩)의 아들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신헌(新軒) 천흡(天洽)으로서 그 후손들은 수륜면(윤동)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신헌공파(新軒公派)로 불린다. 17)

사우당(四友堂)의 삼자(三子)인 담수(聃壽)는 사마시에 합격한 학자로 청천서원·낙암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호(號)는 서계(西溪)이다. 서계(西溪)는 아들 사형제를 두었는데, 이조정랑을 지낸 장자(長子) 정용(廷龍)의 후손이 월담공파(月潭公派)로 상주시에 살고 있고, 차자(次子) 정헌(廷獻)의 후손이 동원공파(東園公派)로 역시 상주시에 살며, 통덕랑을 지낸 삼자(三子) 정계(廷契)의 후손은 낙청공파(洛淸公派)로 수륜면(윤동)과 상주에 거주하며, 성균관 생원을 지낸 사자(四子) 정견(廷堅)의 후손은 국원공파(菊園公派)로 상주시에 살고 있다.

사우당(四友堂)의 사자(四子)인 담기(聃祺)는 호(號)가 서암(西庵)으로 성균생원을 지낸 거유(巨儒)였다. 서암(西庵)의 아들로 학자였던 정직(廷稷)의 후손들은 수륜면(윤동)과 김천시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데 원암공파(圓庵公派)로 불리운다.

또한 16世 교위(副尉) 계손(季孫)은 청천서원(晴川書院)에 배향되어 있으며 그의 증손(曾孫)인 칠봉(七峯) 희삼(希參)은 사자(四子)를 두었는데, 장자(長子)로 목사를 역임한 이계(伊溪) 우홍(宇弘)의 후손은 밀양에 많이 살고 있으며 이계공파(伊溪公派)라고 불린다. 
칠봉(七峯)의 차자(次子)로 관찰사를 역임한 개암(開巖) 우굉(宇宏)의 후손들은 봉화에 많이 살며 개암공파(開巖公派)라고 불린다.
칠봉(七峯)의 삼자(三子)로 유현이었던 사계(沙溪) 우용(宇容)의 후손들은 대가면 칠봉리(사도실)에 살고 있는데 사계공파(沙溪公派)로 일컫는다. 
칠봉(七峯)의 사자(四子)인 동강(東岡) 우옹은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인데 후손이 대가면 칠봉리(사도실)에 살고 있으며 문정공파(文貞公派)라고 일컫는다.

한편 계손(季孫)의 현손(玄孫)인 우영(宇英)의 후손들은 회산공파(晦山公派) 또는 성암공파(省庵公派)라고 불리우는데 성주군 초전면 자양리(내동)에 살고 있으며, 우철(宇哲)의 후손들은 통정공파(通政公派)라고 하는데 성주군 용암면 덕평리(위동)에 거주하고 있다.

이외 16世 부사직(副司直) 중손(仲孫)의 후손들은 영천시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백암공파(栢巖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통정공파(通政公派) 등으로 나눠진다. 윤손(允孫)의 후손들은 김천시에 주로 세거하고 있는데 관란제파(觀瀾齊派) 등으로 불린다.

한편 문절공(文節公) 용초(用超)는 이자(二子)를 두었는데, 장자(長子)인 화(和)는 생원·진사를 지냈고, 수사(水使)를 지낸 차자(次子) 감(鑑)은 그 후손들이 성주군(성주읍·용암면)과 고령군 일대, 달성군 현풍군 및 칠곡군 석적면 등에 많이 살고 있으며 수사공파(水使公派)로 불리운다. 18)

의성김씨 대종회 회장은 중앙정보부장·국회의원·무임소장관을  역임한 김재춘(金在春)씨이며, 성주군 종친회장은 김기대(金基大) 현 경상북도 도의원이다.

현대에서도 국회의원을 역임한 창환(昌煥)·종학(鍾學)·길홍(吉弘)·화남(和男)·충수(忠洙)·명윤(命潤) 등과 전 환경부장관 중위(重緯), 전 문화부차관 도현(道鉉), 전 현대건설회장으로 문화일보 사장인 정국(正國), 전 포항공대총장 호길(浩吉), 전 대구시의회의장으로 금복그룹 회장인 홍식(泓殖), 삼보컴퓨터 부회장 종길(鍾吉), 국회의원 희선(希宣), 청와대비서실 정책실장 병준(秉準),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용대(龍大) 등이 의성김씨를 명문임을 다시한번 각인시켜 놓았다.

※ 엮은이 : 이 재 필
※ 교  정 : 의성김씨 대종회
           의성김씨 성주군종친회

'의성 김씨 선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성 김씨 득관 연원  (0) 2013.01.04
문절공 계파  (0) 2009.06.27
문절공派 중조  (0) 2009.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