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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적 친일분자와 친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

책향1 2007. 8. 19. 06:48
 

자생적 친일분자와 친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

  


  법구경에 “원한은 원한에 의해 풀어지지 않으며 원한은 원한을 버려야 비로소 풀어진다.“란 구절이 있다. 잔혹한 일제강점기를 경험했던 피해자인 우리가 원한을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것은 제대로 된 일본 측의 사과나 성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자생적으로 친일적인 인사가 등장에 우려섞인 눈길을 끌고 있다. 작년 7월부터 모 인터넷사이트에 ‘민비와 조선말기 애국자들’이란 글도 올렸고 최근엔 일본에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란 책을 펴내 40여만 부가 팔려 베스트셀러가 됐다. 더욱 가관인 것은 비자신청이 거부되자 주한일본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신청까지 했다니 일반인의 눈에는 놀라울 뿐이다. 이런 자생적인 친일분자의 등장은 최근 민족문화작가회의 등 5개 단체에서 일제하의 친일문인 42명의 명단 발표와 맞물려 묘한 느낌을 준다. 이 친일 분자의 명단엔 과거 국어 교과서에 작품이 실렸던 서정주, 모윤숙, 김동인, 이광수, 최재서, 최남선등 유명인사가 망라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고 한다. 이는 용서한다는 것이 과거를 백지상태로 돌리자는 말이 아니다.1972년 중국과 국교 회복 후 처음 방문한 일본의 다나카 수상에게 당시의 주은래(周恩來)총리는 ‘前事不忘(전사불망),後事之事(후사지사)’라는 중국 속담을 인용했다. 지난 일을 잊지말고 교훈으로 삼자는 말이다. 중국 영화인 장이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에서는 일본군이 중국인 포로의 살가죽을 벗기는 장면도 있다. 여기에는 진실 여부를 떠나 역사는 역사이고 친선은 친선이란 점을 암시하는 중국인의 잠재적인 의식의 표출이라 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해결되지 않고 그 수가 줄어드는 정신대 할머니나 멀리 사할린이나 남태평양 등으로 끌려가 현지의 원혼이 된 많은 동포를 두고있다. 물론 일본인 중에는 이런 한국인들의 원혼을 추적하는 양심적인 개인도 있다. 이들이야 당연히 용서를 받을만하다.일본이 스스로 우리의 한을 풀어주길 바라며 우리도 큰 마음으로 한을 풀고 용서하는 것이   그들에게 큰 보복이 된다. 분명 용서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아무리 용서하고 싶어도 상대의 태도에 따라서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일본인들을 볼 때 항상 느끼는 솔직한 감정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생적 친일분자의 발생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또 친일하여 자기의 영화를 얻을려고 망명 신청에다 일본에서 이 친일 서적의 전문코너가 서점에 생길 정도의 베스트 셀러는 그 무엇을 말하는가.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낄낄될 사무라이들 연상에 소름이 솟는다. 당국에서는 외란유치죄 등으로 처벌을 준비 중이나 처벌이 마땅치 않는가 보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자의 출현을 보면서 나라를 위해 숭고하게 숨져간 영령들을 다시금 생각해 보자.

 왜 이 무렵에 하필이면 이런 류의 사람이 출현하는가 하는 그 원인을 �아 한번쯤 밝혀보아야 할 것이다.제국주의가 한창 횡행할 무렵에는 몇몇 강대국에 의한 여러 미명하에 약소국가의 점령이 지구의 5분의 4정도였다. 당시 해가 지지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은 전세계 인구와 영토의 25%정도를 지배하였다. 결국은 지구상의 대다수가 이 식민주의를 경험했다는 말이다. 이는 현재의 지구상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부인하든 긍정하든 간에 그 들의 삶에 식민주의의 경험이 부지불식중에 생활이나 사고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나 현재나 침략자들이 피침국에서 원만한 지배나 침략자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부 협조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아왔다.임란 때 함경도에서 왜군에게사로잡힌 순화공등 두 왕자가 포로로 된 일은 같은 조선인인 왜구 길앞잡이가  큰역할을 했음을 우린 역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순화군(順和君) ?∼1607은 선조의 여섯째왕자이다. 어머니는 순빈김씨(順嬪金氏)이며, 부인은 승지 황혁(黃赫)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명을 받아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같은해 5월 왜군이 북상하자 이를 피하여 함경도로 들어가 미리 함경도에 파견되어 있던 이복형인 임해군(臨海君)을 만나 함께 회령(會寧)에서 주둔하였는데, 왕자임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다가 함경도민의 반감을 샀다.

 마침 왜군이 함경도에 침입하자 회령에 위배되어 향리로 있던 국경인(鞠景仁)과 그 친족 국세필(世弼) 등 일당에 의해 임해군 및 여러 호종관리들과 함께 체포되어 왜군에게 넘겨져 포로가 되었다.
이후 안변을 거쳐 이듬해 밀양으로 옮겨지고 부산 앞바다의 배 안에 구금되어 일본으로 보내지려 할 때, 명나라의 사신과 왜장과의 화의로 1593년 8월 풀려났다.
성격이 나빠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불법을 저질러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았고, 1601년에는 순화군의 군호(君號)까지 박탈당하였으나 사후에 복구되었다.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일제 때는 이곳에 건너 온 소수 지배자인 일본인을 위한 수많은 한국인 협력자가 있었다. 그러면 같은 민족이면서 왜 그들은 침략자의 길앞잡이 였으며 동족의 반역자가 되었을까? 자신의 개인 영달을 바란 자부터 선진 외국 세력을 등에 업고 국가 개조란 큰 뜻을 지닌 인물도 있었다. 일부 그들은 근대론자나 개화파로 불리고 있다.이들은 말하자면 무리하게 식민주의 세력이라도 끌여들여서라도 국가를 근대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믿었다. 조국의 근대화를 초우선시했다면 당시 지식인들은 식민주의가 갖고 있던  달콤한 논리에 현혹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무조건 바로 식민주의자를 위한 협력자로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그들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민족 자존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후에 낭만적인 허상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어쩌면 그 당시 상황은 다른 길이 없어 그 길을 가야만 했던 선각자도 있을 것이다.

  최근의 친일파 논쟁에서처럼 우린 정치적인 잣대로만 친일 여부를 논하는 흑백논리에 길들여져 왔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언제까지 이런 단순한 논리에 얽매여 좋은 자 나쁜 자만으로 구분하며 사회적인 논란으로 에너지를 낭비해야만 하는가 하는 자괴감이 생긴다.친일파라 불리면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분위기 속에서 누구하나 그 중에서도 옥석을 가리자는 주장은 파묻혀버리고 그냥 이분법에 익숙하게 된 것이다.일부 친일파 중에도 민족의 장래를 생각해서 망설이면서 부득이하게 협력한 사람들도 있다.끝까지 가족을 버리고 영웅적인 투쟁을 한 독립 투사로부터 선진적인 물질적인 혜택에 매료되어 철저히 친일파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이처럼  피식민국민들의 투쟁 방법은 다양했다는 점을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이런 점은 우리의 정치 상황이나 어쩌면 조선 유교사상의 폐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명분�기에만 익숙하고 다른 이론을 인정치 않으려는 편협한 사고의 산물이다. 식민 지배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의 대응이 있었다는 점을 우리가 간과하고 있다.달리 말하면 말타고 만주 벌판을 달려야만 진정한 애국자로 보는 관점에서 잔혹한 일제에 맞선 대양한 대응이 있었다는 점을 너무 가볍게 여겨 겉모양의 명분만 쫓은 결과이다.

  또한 작금의 일본문화 유입이 보편화되어가는 이 시점에 종속민이었던 우리가 지배자들의 문화를 무엇 때문에 이 처럼 추종할까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불구대천 원수인 지배자들의 문화에 익숙하고 그 것을 즐긴다면 단순 논리로는 절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지만 문화의 다양함을 이해하면 충분히 수용할 만 하다.이는 지배자를 미워하면서도 모방하려는 심리를 학자들의 지적이 있기 전에는 이 점 또한 이해가 힘든 부분이었다. 이는 종속민들의 흔들리는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당시 친일론자나 순수한 독립 투쟁에 일생을 바친 분에 대해 전체적인 일생이나 당시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일부분의 행태를 보고 전체를 문제시하는 점은 명백한 잘못이다.

  역으로 당시 일본에도 기독교 지도자인 우찌무라 간죠(內村鑑三)등을 비롯한 일부 선각자들은 한국병탄에 반기를 들었던 사실은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다.또한 만주에서 본 일본군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장면을 보고 많은 시를 남기고 1938년 동경 형무소에서 옥사한 사회주의자 마끼무라 히로시(牧村 宏)같은 이들의 목소리는 한국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있다. 참고로 그의 시 일부를 소개한다.




               간도 빨치산의 노래


    가엾은 조국이여!

    너 위에 떠도는 주검의 냄새는

    너무나도 끔찍하구나

    총검에 벌집마냥 찔리어서

    목숨 붙은 채 불속에 처 넣어진 사내들!

    능욕 당하고 살은 찢기우고,

    내장까지 끄집어내진

    여자들!

    차돌 하나 손에 든채 목졸려 죽은 노인들!

    어린 손에 태극기 움켜진 채 엎어진 아이들!


     중략


    파도여,격분의 물보라로 두만강을 �어라

    오오,일장기를 펄럭이는 강도의 무리

    나의 부모와 누이와 동지의 피로 땅을 적시고

    이제 총검을 휘두려며 간도로 닥아오는 네놈

    일본 병비들

    *新日本出版社刊 同名詩  181聯중의 하나


이 글은 우리나라의 우국지사가 쓴 글이라고 착각할 만한 내용이지만 이만한 지성을 갖춘 선각자가 당시 일본에도 있었다.여기서 우리의 외눈박이 흑백 논리가 얼마나 무섭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철저한 일본적인 관점으로 보면 반역자이지만 우리 사회의 맹목적인 자생적인 친일분자와 대조해보면 우리에게 무엇을 느끼게 한다.단지 사회의 다양성만 논의한다며 객관적으로 보면 자생적인 친일 분자나 위의 분이나 이단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약자 입장인 우리를 강조한다면 이와 같은 친일분자의 노림수가 과연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

  이런 다양성의 관점에서 보면 춘원 이광수가 민족 개조론을 집필하면서까지 우리 민족의 발전을 추구했다면 현재의 친일분자 인정은 그 분이 산 당시의 전체적인 일상을 제대로 꿰뚤어 보지 못한 오류가 있다고 보여진다.과연 당시 이런 선각자가 아닌 평범한 분들의 민족의식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지 못한 오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역사나 책에 등장하지 않는 소외계층의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 현재의 잣대로 단순히 친일분자로 낙인찍는 일은 전체적인 식민 사회를 보지않은 잘못을 저질렀고 전체적인 평가는 연구자들이 다시금 정확한 전반적인 당시의 사회의 국가 인식과 상황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새로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친일론이 정립되기를 학수고대한다. 자생적 친일분자의 새로운 등장을 보며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다시한번 들여다 보며 새로운 평가 기준에 의한 친일세력의 평가를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또한 과거의 친일만 논하느라 시간만 낭비하고 발등부터 찍히며 등잔불 밑이 어두워 새로운 친일분자의 출현을 예상 못한 점은 우리사회의 맹점으로 남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한 전체 국민의 정서와 상반되는 이런 자생적인 친일분자의 준동을 보며 준엄하게 꾸짖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 동안 너무 친일화된 것은 아닌지 곱씹어보아야 할 것이다.궁극적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한 여러 조치를 취해야 하고 무분별한 친일적인 발상이 나오게 된 사회의 원인을 분석하여 미연에 방지하는 노력을 기울려야 하고 또한 우리 전체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다시는 역사의 우를 범하여 주변국으로 부터 멱살 잡히는 어리석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눈을 부릅떠야 할 시점에 우리 모두가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