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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향자의 넋두리

책향1 2012. 6. 8. 12:20

 

전향자의 넋두리


역사에서 생사여탈권이 있던 제왕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는 자는 비일비재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반대의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로 정몽주도 사육신도 서포 김만중도 있다. 정약용의 경우는 좀 달랐다. 동지승부에 등용된 정약용은 임직을 고사하며 간곡한 소를 올려 사실상 전향을 했다. 고서 내용이긴 하지만 “신이 말하자면 서양 사설(邪說)을 보고 일찍부터 기뻐하며 사모하였던 바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였으며 기름이 번져 물을 더럽히고 있는데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고 했다.

물론 그가 처한 정황상 신상문제가 있었다. 당시 조정을 장악한 노론 벽파가 왕의 친위세력 격인 시파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우두머리인 정약용의 약점, 즉 천주교 이력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아킬레스건인 사상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조선왕조실록 1797년 6월 21일자 기사> 우리 역사상 당쟁도 이런 사상 문제가 많은 문제를 야기했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서포는 세 번의 유배를 갔다. 사상의 자유에서 사상문제가 문제시 되는 경우는 모순이 있긴 하다. 서슬 퍼런 형리 앞에서 사상의 자유를 외치기에는 세상이 너무 녹록치 않다. 그래서 이인모가 탄생하고 주사파도 생긴다.

최근 “극단적인 전향 그 지독한 자기애”로 전향자들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여기에 따르면 무장공비들이 남파 후 검거되어 전향한 사람이나 김현희 등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들은 이북의 가족을 남겨둔 채 자신만의 영화를 위해 전향한 사람이란 비난에서 지독한 자기애로 여겨진다. 꼭 이럴 경우에 이런 평가가 물론 전부가 아니다.

외자 도입을 해서 경제 개발을 할 때 학생들은 외세의 동침이라 했다. 여기에 박대통령은 외자로 “우리가 술을 사먹었냐?”고 했다. 지금 결과로 보면 박대통령의 판단이 맞았다. 자본도 기술도 없던 나라에서 일본 배상금을 비롯한 외자는 우리 산업의 쌀 격이었다.

하태경을 보면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주사파 학생 운동으로 두 차례 구속된 인물이다. 그가 보수 꼴통으로 비난 받는 새누리당 의원이 됐다. 그와 비슷한 이력을 가진 전향자는 다수 있다. 그들이 왜 전향을 했는지는 만나보지 못해 알기 힘들다. 하태경은 통합진보당 소속 이석기를 “북한하고 직접 연결된 지하조직 통혁당의 5위 안에 드는 고위직”이라 폭로를 했다. 전향하면서 옛 동지까지 치부를 알려 주었다.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 충북 영동의 이섭진 용화지서장(당시 29살·1989년 작고)은 부인 박청자 씨(당시 29살·1979년 작고)가 "죄 없는 사람을 죽일 것이냐"라며 설득하여 보도연맹 주민 40~50명을 놓아주었다. 이 일로 그는 1961년 비위경찰로 몰려 경찰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변두리에서만 일해야 했고 그나마도 감시를 당했다. 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마을 주민들이 환영대회를 열어주고 돈을 스스로 거둬 감사비를 세울 만큼 지역에서는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유교 중심사회에서 변절자는 사회의 악이었다. 우리가 유교적인 실리와 명분에서 갈등이나 하고 있기에는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변절자 논쟁은 제로섬 게임이고 분단국으로서의 사상 전향은 그 방법과 결과가 나쁘지 않다면 비난할 필요가 없다. 주적이 한참 보복공격을 떠들고 있고 그에 동조하는 이가 있다면 정말 북으로 보내야 한다.
적전분열 양상은 누구에게 득이 될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를 방지할 대책도 없이 여,야 모두 말꼬리 잡기에만 능란하다. 강기갑의원이 종복보다 종미가 문제라고 하니 이 말을 북한 방송도 그대로 따라했다.
일단 주적이 보복 타격을 연일 떠들고 좌표까지 읊는 상황에서 북을 이롭게 하는 발언을 자제해야 하고 여기서 종북주의자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명분과 실리 싸움에서 명분이 이기는 역사적인 사건을 많이 보아 왔다. 국가 지도자격인 국회의원들이 실리를 구하지 못하는 명분에서 국민들이 도탄에 빠진 적은 한 두 번이 아니다.
술집에서 탈북자에게 막말한 임 의원은 명분만 찾고 실리를 도외시 한 모습이다. 조선 시대적 유교 관점에서 파악할 것이 아니고 자기와 사상이 다르다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지역에서도 변절자이기도한 실리론자들의 “변절자의 넋두리”를 듣고 싶다. 특정인을 일단의 지지 카데고리를 거두는 일일 수 있다.

사회 상황에 따른 전향을 변절로 몰아 세우는 일도 자제해야 한다. 시대적인 현실을 도외시한 채 유교적인 가치만 내세우는 것도, 적의 공격 위협에서 도리어 이적 행위는 일단 접어두고 판단해야 한다. 준전시 하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변절자의 넋두리도 국가관에 맞춰서 비하만 해서는 않된다.